본문으로 건너뛰기
메리 스크랜튼 초상Wikimedia Commons

메리 스크랜튼

Mary F. Scranton · 1832–1909 · 미국

북감리회여성 교육한양 · 정동
우리 학교는 무엇보다도, 조선 소녀를 더 나은 조선 소녀로 길러내는 학교입니다.
이화학당 연례보고(미감리회 여선교부, 1895–96) · ※널리 퍼진 ‘한 사람의 조선 소녀라도’는 출처 불명 의역

북감리회 여선교사. 단 한 명의 학생에서 시작해 1886년 이화학당을 세웠다. 조선 여성 교육의 문을 연 인물로, “한 사람의 조선 소녀라도”라는 마음으로 헌신했다.

이야기

메리 스크랜튼은 이미 쉰을 넘긴 나이에 조선으로 떠났다. 미국에서 목사의 딸로 태어나 신앙 안에서 자란 그는, 남편을 일찍 여의고 아들을 의사로 키워낸 어머니였다. 인생의 후반에 접어든 한 여인이, 낯선 동양의 나라로 가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1885년, 그는 의사인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과 함께 입국했다. 당시 조선에서 여성은 배우지 못했고, 집 밖으로 나서는 일조차 드물었다. 딸을 학교에 보낸다는 것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던 일이었다.

그는 학교를 세우려 했으나, 처음에는 보내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마침내 단 한 명의 학생으로 수업이 시작되었다. 그 한 명이 이화학당의 시작이었다. '한 사람의 조선 소녀라도'라는 마음, 그것이 그가 붙든 전부였다.

그는 화려한 성과를 좇지 않았다. 여성을 진료하고,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한 명 한 명을 가르쳤다. 눈에 띄지 않는 일들이었고, 그 일의 열매는 그의 생전에 다 드러나지 않았다.

조선에서 그는 늙어갔고, 끝내 이 땅에서 생을 마쳤다. 먼 곳에서 와 노년을 다 바친 셈이다.

단 한 명에서 시작한 그 학교는 훗날 수많은 조선 여성이 배우는 자리가 되었다. 큰 결심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라는 작은 마음이 문을 열었다. 부름은 젊고 강한 자에게만 오는 것이 아님을, 그의 삶이 조용히 말해 준다.

걸어온 사역
  • 1885년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과 함께 입국(당시 50대의 나이)
  • 1886년 단 한 명의 학생으로 이화학당을 시작 — 한국 여성 근대교육의 효시
  • 여성을 위한 진료·전도 사업으로 상동·동대문 지역 여성 사역을 확대
남긴 열매

이화학당은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으로 김활란을 비롯한 여성 지도자를 배출했고, ‘여성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복음의 빛이 조선 여성의 지위를 바꾸는 출발점이 되었다.

Korea is home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조선을 집으로 삼았습니다. 양화진에 잠들어 있습니다.

입국
1885년
소속
미국 북감리회
사역
여성 교육
대표 업적
이화학당 설립
심화 연구 · 학생 탐구배꽃 아래 첫 스승 — 메리 스크랜튼과 이름 없던 소녀들이야기 읽기 →

관련 영상

이 땅을 사랑한 예수의 증인들 — 조선 여성을 일깨운 메리 스크랜턴 · CBS
다큐 ‘女선교사 조선을 비추다’ — 메리 스크랜턴과 로제타 홀 · CGNTV

참고 출처

  • 한국 기독교의 역사 I
    한국기독교역사학회
  • 개화와 선교의 요람 정동이야기
    이덕주

외부 링크

사진 출처: Wikimedia Commons (CC/PD)

이 페이지 인용하기

Missionaries from Aunae (Dreamy School). 「메리 스크랜튼 (Mary F. Scranton, 1832–1909)」. https://missionaries-khaki.vercel.app/people/mscranton (열람: 2026. 7. 4.)

잠시, 묻는 자리

메리 스크랜튼의 삶에서,
당신은 무엇이 아름답다고 느꼈나요?

정답은 없습니다.
다만 이 질문을 가지고 가세요 —
나라면 무엇에 내 삶의 값을 치르고 싶은가.
복음이라는 바통은, 이제 당신의 손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