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화 연구 · 학생 탐구
배꽃 아래 첫 스승 — 메리 스크랜튼과 이름 없던 소녀들
쉰둘의 나이에 조선으로 건너와, 이름조차 갖지 못한 여인들에게 글과 복음을 건넨 한 미국 여인의 스물네 해. 그는 조선을 조선답게 사랑했다.
✍️ 드리미학교 ‘Missionaries from Aunae’ · 박제희 심층 연구
AI 일러스트
메리 스크랜튼
Mary F. Scranton이름 없던 조선의 소녀들에게 이름과 글을 준 ‘한국 여성 교육의 어머니’
- 본명
- Mary Fletcher Scranton (한국명 시란돈·스크랜튼 대부인)
- 생몰
- 1832–1909
- 입국
- 1885년 6월, 정동
- 거점
- 서울 정동 — 뒤에 동대문·상동으로
- 사역
- 이화학당·보구여관·전도부인 양성·지방 순회 전도
- 잠든 곳
- 서울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 매사추세츠 벨처타운의 감리교 목사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목사 에라스투스 벤튼, 남편은 코네티컷 뉴헤이븐의 제조업자 윌리엄 스크랜튼으로 1855년 결혼했으나 사별했다. 외아들 윌리엄 벤튼 스크랜튼(역시 ‘시란돈’)은 의사가 되어 어머니와 함께 조선 개척 선교에 나섰다.
인물 상세 페이지 →매사추세츠의 한 목사관에서, 대대로 강단에 서던 집안의 딸이 있었다. 아버지도 오빠도 목사였고, 그녀 자신은 젊은 날 상인의 아내가 되었다가 마흔에 남편을 잃었다. 그 뒤로는 예일에 다니는 외아들을 뒷바라지하며, 교회 여성해외선교회의 작은 살림을 맡아 조용히 나이 들어가던 여인이었다.
그가 조선이라는 낯선 이름을 처음 마음에 품은 것은 쉰을 넘긴 뒤였다. 이름조차 갖지 못한 조선 땅의 소녀들을 위해 헌금하겠다던 한 노부인의 말이 씨앗이 되었고, 그 씨앗은 뜻밖에도 자신을 개척 선교사로 조선에 데려다 놓았다. 쉰둘의 스크랜튼은 그렇게, 자기 나라에서도 새 일을 시작하기 어렵다는 나이에, 바다 건너 배밭 언덕에서 다시 태어났다.
레베나의 작은 헌금 — 한 노부인의 눈물에서 시작된 일
AI 일러스트1883년 가을, 미국 오하이오의 작은 도시 레베나에서 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WFMS)의 지방 모임이 열렸다. 그날의 화제는 인도와 일본이었고, 아직 문을 닫아걸고 있던 조선을 마음에 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자리에 있던 한 나이 든 부인 — 볼드윈 여사로 전해진다 — 이 일어나, 자신에게 얼마간의 돈이 있으니 그것을 하나님께 바치겠노라 했다. 언젠가 조선이 문을 열 때까지 그 돈을 선교회에 맡기겠다는 것이었다.
“이 작은 헌금이 이름조차 갖지 못한 조선 땅의 소녀와 여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쓰이기를 바랍니다.” 뒷날 스크랜튼은 이 장면을 두고, 다른 모든 이가 잊고 있던 것을 오직 그 부인의 눈만이 보았다고 적었다. 이 헌금이 마중물이 되어 조선 여성을 위한 선교 기금이 모였다.
여성해외선교회는 남북전쟁을 지나며 여성들이 스스로 무엇인가를 이루려던 시대의 결실이었다. 남성 선교사의 보조원이 아니라, 여성이 여성에게 직접 다가가겠다는 정신 — 그 원리가 훗날 조선 땅에서 “한국 여성이 한국 여성에게”라는 스크랜튼의 지침으로 다시 피어난다.
쉰둘의 결심 — 아들의 병상에서 오간 대화
1884년, 감리교 해외선교부는 의사인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 부부에게 조선 파송을 제안했다. 처음에 해외 선교에 뜻이 없던 며느리는 이를 사양했다고 전해진다. 그 무렵 아들과 어린 손녀가 병으로 앓아누웠고, 스크랜튼은 아들의 곁을 지키며 간병했다. 한 달 뒤 아들이 회복되자, 그는 아내에게 선교사로 헌신하겠노라 고백했다.
병상에서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후대의 연구는, 그 조용한 간병의 시간 동안 어머니가 아들에게 선교의 길을 권했으리라 조심스레 짐작한다. 정작 자신은 나이를 이유로 여러 번 사양했으나, 여성해외선교회 지도자들의 끈질긴 설득 끝에 결국 쉰둘의 나이에 조선의 개척 선교사가 되기로 했다.
1884년 10월 정식으로 임명받았다. 사람들은 그를 ‘스크랜튼 대부인’이라 불렀다. 훌륭한 아들을 둔 어머니라는 뜻이 담긴 그 호칭은 당시 흔히 쓰였으나, 오늘의 시선에서는 그를 한 사람의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 선생’으로 부르는 편이 마땅하다.
‘내 백성에게로 가고 싶다’ — 도착하기도 전에 품은 사랑
AI 일러스트일행은 아들 내외와 두 살배기 손녀, 아펜젤러 부부와 함께 1885년 초 조선을 향해 떠났다. 그러나 몇 달 전 일어난 갑신정변의 여파로 서울의 공기가 흉흉했고, 미국 공사의 만류에 따라 일행은 먼저 일본에 머물며 때를 기다렸다.
일본에서 스크랜튼은 이수정을 비롯한 개화파 지식인들에게 조선말과 문화를 배웠다. 편지에는 이렇게 적었다. “이곳 환경은 아주 좋습니다. 선교사들도 더할 나위 없이 잘하고 있고 생활도 유쾌합니다. 그러나 나는 어서 가서 내 백성 가운데 살기를 바랍니다.” 아직 밟아보지 못한 땅의 사람들을 그는 벌써 ‘내 백성(my own people)’이라 불렀다.
먼저 아들이 홀로 서울에 들어가 정동에 집과 부지를 마련했다. 마침내 1885년 6월, 스크랜튼 일행이 인천을 거쳐 정동에 여장을 풀었다.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처음 몇 달은 여러 시련을 겪었지만 불유쾌하지 않았다. 한국인이 우리 마음에 든 것은 사실이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전하려는 마음은 점점 커져 갔다.”
규방에 숨은 아이들 — 학생 하나 구할 수 없던 시절
AI 일러스트정동에 자리 잡은 스크랜튼이 곧바로 착수한 일은 여성을 위한 학교였다. 아펜젤러의 갓난 딸을 추운 방에 눕힐 수 없어 품에 안고 재우던 어느 밤, 조선 소녀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기로 마음먹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정작 가르칠 학생이 없었다.
상류층과 중산층의 딸들은 규방 깊이 숨겨져 있었고, 하층의 여자아이들은 사고팔리고 있었다. ‘여자와 소인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여자는 아들을 낳고 살림하는 것 외에 쓸모가 없다 — 그런 말이 상식으로 통하던 시절이었다. 일곱 살만 넘으면 남녀가 한자리에 있어서도 안 되었다.
그리하여 이화의 첫 학생들은 세상이 버린 아이들이었다. 영어를 배워 왕비의 통역이 되기를 바란 고관의 소실 김 부인, 목숨을 부지할 수 없어 어머니가 맡긴 아이, 전염병을 앓다 성벽 아래 버려진 별단이. 버려진 아이들을 데려다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가르치는 것 — 그것이 조선 여성 교육의 시작이었다.
휘장을 사이에 두고 — 내외법을 넘어서는 방법
조선의 내외법은 완강했다. 남녀가 한자리에 앉을 수 없었으니, 학교와 예배 또한 그 벽을 피해 갈 길을 찾아야 했다. 스크랜튼과 동료들은 정공법이 아니라 슬며시 에도는 길을 택했다. 설교자와 회중 사이에 휘장을 치고, 세례를 줄 때는 휘장에 구멍을 내어 고개만 내밀게 했다.
한문을 가르치는 남자 교사는 휘장 뒤에서 강의했고, 몇 해 뒤에는 아예 칠판만 바라보고 등을 돌린 채 수업했다고 전해진다. 이 어색한 방식은 곧 한계에 부딪혔다 — 결국 조선인 여교사가 필요했다. 1889년 이경숙이 부임해 언문과 한문을 가르치며 이화 최초의 한국인 교사가 되었다.
휘장은 답답한 임시방편이었지만, 동시에 스크랜튼의 태도를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했다. 그는 조선의 관습을 정면으로 부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관습 안에서 여자아이가 배울 수 있는 틈을 만들어 냈고, 그 틈을 조금씩 넓혀 갔다.
‘이화’라는 이름 — 왕실이 내린 배꽃 학교
AI 일러스트스크랜튼은 왕실과의 관계를 정성껏 맺으려 했다. 왕실이 인정한 기관이라면 민간의 저항도 줄어들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1887년 초, 그의 집에서 열린 초청 만찬이 뜻밖의 전환점이 되었다. 외부 독판 김윤식과 고위 관리들이 여학교를 찾아왔고, 환등기로 서양의 풍경과 성경 이야기를 보여주자 반응이 뜨거웠다. 여학생들이 들어와 교리문답을 하고 찬송을 불렀는데, 종교 행위였음에도 손님들은 흡족해했다.
이 만찬을 계기로 외부 독판이 국왕을 적극 설득했고, 몇 주 뒤 왕실은 학교에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배꽃은 조선 왕실을 상징하는 오얏꽃과 모양과 한자가 같아 종종 왕실 문양으로 쓰이던 꽃이었다. 국왕이 보낸 호위 기수까지 더해져, 이화는 국가가 공인한 학교가 되었다.
스크랜튼 자신은 ‘전신학당(Entire Trust School)’이라는 이름을 마음에 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뒷사람들은, 그 신학교 같은 이름으로 지어졌다면 오늘의 이화 같은 세계적 여자대학으로 자랐을지 의문이라고 적었다. 아펜젤러의 남학교에는 ‘배재학당’, 아들의 병원에는 ‘시병원’이라는 사액이 내렸다.
보구여관 — 여인의 몸을 여인이 돌보다
스크랜튼은 본국에 여성 선교사를 더 보내 달라고 거듭 청했다. 1887년 가을, 독신 여선교사 로드와일러와 의사 하워드가 왔다. 로드와일러는 조선말을 익히기도 전에 이화학당 교단에 섰고, 하워드는 이화 아래쪽 한옥에 자리를 마련해 조선 최초의 여성 전용 병원 ‘보구여관(保救女館)’을 열었다.
내외법이 완강하던 시절, 여인은 남자 의원 앞에 몸을 보이느니 병을 안고 죽는 편을 택하곤 했다. 여의사가 여인을 진료하는 병원은 그래서 단순한 의료 기관 이상이었다. 보구여관은 뒷날 동대문 부인병원으로 이어지며 조선 여성 의료의 뿌리가 되었다.
이 병원은 또한 조선인 여성 의료인을 길러 냈다. 정동 선교부에서 일하던 김점동 — 뒷날의 박에스터 — 은 셔우드 홀에게 간호 교육을 받고, 미국 유학을 거쳐 1900년 무렵 조선인 최초의 여성 의사가 되었다. 버려진 소녀를 거두는 데서 시작한 사역이, 스스로 병을 고치고 남을 가르치는 여성을 배출하기에 이른 것이다.
영아 소동 — 돌팔매 속에서 더 단단해진 믿음
1888년 봄, 조선 정부가 종교 전파를 금하는 명을 내렸다. 그 무렵 서양인들이 조선 아이를 유괴해 실험에 쓰거나 노예로 팔아넘긴다는 흉흉한 풍문이 돌았다. 성난 군중이 선교부로 몰려와 돌을 던지며 학교와 병원을 부수려 했다. 이른바 ‘영아 소동(Baby riot)’이었다.
소요는 여섯 주 만에 가라앉았다. 인천에서 미국 함대의 수병들이 올라와 선교사들을 지켰고, 조선 정부도 오해를 풀라 명하며 최선을 다했다. 스크랜튼은 이를 ‘민중의 시험기’를 통과한 사건으로 여겼다. 무지와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었기에, 사정을 알게 된 민중은 오히려 선교사들을 이해하고 신뢰하게 되었다.
이 시련은 도리어 전화위복이 되었다. 금령에도 학생들의 배움과 신앙의 열정은 더 뜨거워졌고, 불신자였던 아이들까지 변해 갔다. 스크랜튼의 집에서 다시 열린 주일 저녁 여성 집회에는 바깥사람들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조선인이 이끈 신앙 — 최초의 여성 교회와 순이 이야기
흥미롭게도 스크랜튼의 사역은 그가 앞장서 밀어붙였다기보다, 조선인들의 열망에 떠밀려 확장된 경우가 많았다. 토착 여인 둘이 찾아와, 번역된 쪽복음서를 들고 나가 다른 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겠다고 했다. 그는 이 일을 두고 “어찌 사소한 일이겠습니까”라고 적었다.
1889년, 아펜젤러가 여성 속회를 조직하고 그해 연회에서 여성만의 교회 설립이 결정되면서, 조선 최초의 여성 교회가 세워졌다. 평균 출석 인원은 약 마흔 명으로, 같은 시기 배재학당 남성 집회의 열다섯 명을 넘어섰다. 남녀가 한 지붕 아래 모일 벽돌 예배당이 마련되는 1897년까지, 이 여성 교회는 여성 선교와 교육의 구심점이 되었다.
성경 교육을 청한 것도 조선인들이었다. 이화 학생 순이는 주일마다 집에 가 부모에게 자신이 배운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을 읽어 주었다. 그런데 그 곁에 병원에서 일하는 부인들과 환자들, 방문객까지 모여들어 듣곤 했다. 스크랜튼은 이 아이를 두고 “스스로 임명받은 전도부인”이 되었다고 적었다. 이 소녀의 전도가 계기가 되어, 선교사들은 본격적으로 병원 전도에 나섰다.
전도부인 — 조선 여인이 조선 여인에게
스크랜튼은 처음부터 토착 전도부인을 적극적으로 세웠다. 외국인 선교사보다 조선인 전도자가 더 깊이 다가갈 수 있음을 알았고, ‘여성이 여성에게’라는 여성해외선교회의 원리를 ‘조선 여인이 조선 여인에게’로 조선 땅에 옮겨 심었다.
그는 사회와 가정에서 버림받은 소녀와 여인들을 양딸로 거두어, 교사와 전도부인으로 길러 냈다. 양딸 여메레는 간호사 겸 전도부인으로, 양딸 이경숙은 이화 교사이자 전도부인으로 활약했다. 개성 출신의 백헬렌은 방물장수로 변장해 집집을 돌며 물건을 팔면서 복음을 전해, 인천 사역을 크게 일으켰다고 전해진다.
이 전도부인들과 함께 스크랜튼은 환갑을 넘긴 몸으로 지방을 순회했다. 매년 대여섯 명에서 아홉 명의 전도부인을 이끌고 수원·오산·이천·여주 같은 경기 남부의 마을들을 돌았다. 죄로부터의 구원과 더러움으로부터의 구원을 함께 가르쳤고, 글을 배우면 여자도 성경을 스스로 읽을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상동으로 — 민중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다
정동은 외국 공관이 들어선 언덕이라, 가난한 환자와 버려진 사람들이 찾아오기 어려운 곳이었다. 스크랜튼 모자는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이라는 뜻을 품고, 서대문 밖 애오개와 남대문 안 시장 언덕, 동대문 성벽 안쪽 — 민중이 사는 곳마다 시약소를 열었다.
그 가운데 남대문 안 상동은 제2의 서울 선교 기지가 되었다. 열악한 자리였지만 “민중이 있는 곳이기에” 스크랜튼은 그리로 거처를 옮겼다. 작은 집에 머물며 ‘같이 살며 전도하기’를 택했고, 자신이 살던 남대문 안 달성위궁의 기와집을 사비로 예배당으로 고쳐 교인들에게 기증했다. 이것이 달성회당이다.
교인은 빠르게 늘어 1898년에는 삼백 명을 넘어섰다. 특히 여성 교인들의 믿음이 남성을 앞질렀다고 전해진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같은 헌금을 거르지 않던 여인들, 마당에 천막을 치고 예배드리던 무리 — 한 교인은 천 명이 들어갈 예배당을 달라 기도하기 시작했고, 그 기도는 훗날 미드기념예배당으로 응답된다.
부인성경학원 — 여성도 신학을 배우다
스크랜튼은 개인적 차원에서 오래도록 부인들을 가르쳐 왔다. 이화학당에서 시작한 교리 공부반은 전도부인 양성 과정으로, 다시 신학 교육으로 자라났다. 남성 선교부가 배재학당 안의 신학회를 통해 목회자를 기르는 동안, 여성 선교부에는 아직 신학교라 부를 것이 없었다.
1900년, 그는 감리교 부인성경학원(The Methodist Bible Woman’s Training School)을 세웠다. 달성위궁의 자택에서, 전도부인으로 일하거나 되기를 바라는 여성들을 모아 사복음서 요약과 성경 역사를 가르치고 단계별 교리문답을 익히게 했다. 남성 중심으로만 이뤄지던 목회자 양성에, 마침내 여성의 자리가 열린 것이다.
한 동료는 스크랜튼을 두고 “부인성경학원의 모퉁잇돌이 되셨다”고 적었다. 그가 세운 것은 학교라기보다 하나의 통로였다 — 사회에서 가장 소외되었던 여성들이 신학이라는 열린 학문에 발을 들이는 통로.
월강송별 — 강을 건너 배웅한 이별
1898년 11월, 예순여섯의 스크랜튼이 두 번째 안식년을 위해 서울을 떠났다. 본인은 쉬고 돌아올 생각이었지만, 동료들과 교인들은 마지막 이별인 양 슬퍼했다. 수많은 남녀 교인이 남대문을 나와 한강 나루까지 삼 마일을 행진했다.
한 기록은 그 광경을 사도 바울을 배웅하던 에베소 장로들에 비겼다. 사람들은 나루에서 손을 흔드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함께 배를 타고 노량진까지 건너가 그곳에서야 작별했다. 강을 건너 배웅했다 하여 ‘월강송별’이라 불린다.
떠나기 전 그는 상동 교인들에게, 새 예배당을 지을 비용을 감당하겠다는 미국의 한 교인이 있다는 소식을 알렸다. 스위스에서 손녀와 딸들을 만나 오랜만에 쉰 그는, 1900년 초 다시 서울로 돌아와 약속대로 사천 달러를 들여 미드기념예배당을 지었다.
노년에도 결실을 주소서 — 은퇴를 거부한 마지막 봉사
AI 일러스트봉헌식을 마치자마자 스크랜튼은 병으로 자리에 누웠다. 국내 치료가 어려워 아들과 함께 본국으로 건너갔고, 고령이라 회복이 더뎠다. 그러나 1904년 건강을 되찾자,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살아 돌아온 감격으로 다시 조선 땅을 밟았다. 이미 일흔이 넘은 나이였다.
그는 시편 기자의 기도를 되뇌었다. “노년에도 결실을 주소서.” 자신을 기브온 사람처럼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자”로 낮추면서도, 상동교회와 경기 남부의 마을들을 쉼 없이 순회했다. 1905년의 마지막 지방 여행에서는 열여섯 마을에서 아흔한 차례 집회를 열었다.
작은 마을의 작은 교회에서, 그는 울먹이며 기도했다고 전해진다. “불과 십오 년 전 이 땅을 다닐 때는 교회 하나 볼 수 없었더니, 지금은 가는 곳마다 예배당 깃발이 나부낍니다.” 그가 그저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전도가 되는 경지에 이르렀다. 마지막 여행은, 지난 이십 년간 뿌린 씨앗에 대한 응답이었다.
한국인을 더 나은 한국인으로 — 그가 믿은 교육
스크랜튼의 교육에는 뚜렷한 신념이 있었다. 1888년 그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의 목표는 이 여아들을 우리 외국인의 생활과 의복과 환경에 맞도록 바꾸는 데 있지 않다.” 학생들에게 한국식으로 요리하고 옷 짓는 법을 가르쳤고, 조선의 예절과 문화를 존중했다.
그가 바란 것은 서양인을 닮은 조선인이 아니라 “한국인을 보다 나은 한국인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학생들이 조선인임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도리어 긍지를 갖기를, 그리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통해 ‘완전무결한 한국인’이 되기를 희망했다. 무늬만 기독교인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대로 행동하는 조선인 말이다.
그 뿌리에는 여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여성도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남성과 평등하며, 교육받아 함께 나라의 역사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 1909년 그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 이화에 대학과가 설치되었으니, 여성 교육을 시작한 지 스물다섯 해 만의 일이었다. 그가 심은 정신은 그렇게 열매를 맺어 갔다.
양화진에 잠들다 — 그러나 열매는 계속 맺힌다
AI 일러스트1907년 말부터 건강이 다시 무너졌다. 지방을 다닐 수 없게 된 스크랜튼은 서울에 머물며, 자리에 누워 찾아오는 선교사와 전도부인들을 지휘했다. 마비 증세가 오기 사흘 전에는, 집안 하인들과 가까이 지낸 교인들을 불러 마지막 성찬을 나누었다고 전해진다.
1909년 10월 8일 이른 아침, 그는 본향의 부르심에 응했다. 향년 일흔여섯이었다. 장례는 상동교회에서 치러졌고, 그의 뜻대로 서울 양화진 선교사 묘지에 안장되었다. 이십 리에 이르는 긴 인파가 장례 행렬을 뒤덮었고, 관 앞에서 세 번 절하여 마지막 경의를 표한 관리도 있었다 전한다.
그를 기려 사람들은 이렇게 적었다. “그는 떠날지라도 그가 기울인 교육의 열매는 계속 맺힐 것이다.” 매사추세츠의 목사관에서 태어난 한 여인이 배꽃 언덕에서 시작한 일은, 이름 없던 소녀들을 이름과 글과 사명을 가진 지도자로 바꾸어 놓았다. 그것이 그가 조선을 조선답게 사랑한 방식이었다.
가상 인터뷰
※ 학생이 메리 스크랜튼의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창작 인터뷰입니다. 실제 발언 기록이 아닙니다.
- Q. 안녕하세요. 인터뷰에 앞서 간단히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 메리 스크랜튼입니다. 미국 매사추세츠의 목사관에서 태어나, 대대로 강단에 서던 집안에서 자랐지요. 남편을 일찍 여의고 아들을 키우며 여성해외선교회 일을 돕다가, 쉰이 넘어 조선의 개척 선교사로 이 땅에 왔습니다. 정동에서 여학교와 여성 병원을 시작하고, 지방을 돌며 부인들에게 글과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스크랜튼 대부인’이라 불렀지만, 저는 그저 조선 여인들의 스승이고 싶었습니다.
- Q. 조선 땅을 밟으셨을 때가 쉰둘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자기 나라에서도 새 도전을 하기 어려운 나이인데, 어떻게 개척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셨는지요.
- 그 시작은 제가 아니었습니다. 오하이오 레베나의 한 모임에서, 나이 든 부인 한 분이 이름조차 없는 조선의 소녀들을 위해 헌금하겠다고 일어선 일이 있었지요. 그 작은 헌금이 씨앗이 되어 조선 여성 선교의 기금이 모였습니다. 저 자신은 나이를 핑계로 여러 번 사양했습니다만, 여성해외선교회 지도자들의 설득이 어찌나 끈질기던지요. 결국 쉰둘에 임명을 받았습니다. 나이가 많다는 것은, 돌이켜보면 핑계였을 뿐입니다.
- Q. 조선 땅을 밟기도 전부터 조선을 사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 일본에 머물며 조선말을 배우던 때, 본국에 편지를 이렇게 썼습니다. 이곳 생활도 유쾌하고 선교사들도 잘하고 있지만, 나는 어서 가서 ‘내 백성’ 가운데 살고 싶다고요. 아직 만나 보지도 못한 사람들을 벌써 제 백성이라 부른 셈이지요. 마음이 먼저 그 땅에 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 Q. 그 시절 조선은 지금과 비할 수 없이 가난하고 위험한 곳이었다지요. 어떤 마음가짐으로 그 땅에 서셨습니까.
- 특히 여인들의 처지가 어두웠습니다. 상류층 딸은 규방에 갇혀 있었고, 가난한 집 아이는 사고팔렸습니다. ‘여자는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상식이던 시절이니까요. 위험이 없다고는 못 하겠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저희는 결코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지혜를 넘어서는 약속을 믿었으니까요.
- Q. 그렇게 세우신 것이 바로 이화학당이군요. 처음 학교를 여셨을 때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 부끄럽지만 학생 하나 구하기가 그토록 어려웠습니다. 첫 학생은 왕비의 통역이 되고 싶어 온 고관의 소실이었는데, 공부에 흥미가 없어 석 달 만에 떠났지요. 제 곁에 오래 남은 첫 학생들은 세상이 버린 아이들이었습니다. 너무 가난해 어머니가 맡긴 아이, 전염병을 앓다 성벽 아래 버려진 아이. 그런 아이들을 데려다 먹이고 재우고 가르치는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다 저희 집에서 관리들을 모신 만찬을 계기로, 왕실이 ‘이화’라는 이름을 내려 주셨지요. 배꽃 학교라는 뜻입니다. 그 뒤로는 부모들이 안심하고 딸을 맡기게 되었습니다.
- Q. 이화학당 이후에는 전도와 성경 교육에도 힘쓰셨다고 들었습니다.
- 제가 앞장서 밀어붙였다기보다, 조선 사람들이 저를 그리로 이끈 편입니다. 토착 여인 둘이 찾아와, 번역된 쪽복음서를 들고 다니며 다른 부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겠다고 했습니다. 어찌 사소한 일이겠습니까. 순이라는 학생은 배운 성경을 부모에게 읽어 주다가, 어느새 병원 사람들까지 모아 놓고 전하고 있었지요. 스스로 임명받은 전도부인이 된 셈입니다. 저는 그저 그 열망에 응답했을 뿐입니다.
- Q. 사역 중 가장 큰 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 ‘영아 소동’이라 부르던 일이 있었습니다. 서양인이 조선 아이를 유괴한다는 흉흉한 풍문에, 성난 군중이 돌을 던지며 학교와 병원을 부수려 했지요. 종교 활동을 금하는 명까지 내려 집회가 끊겼습니다. 피신할 계획까지 세웠던, 조선에 와서 겪은 첫 시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도리어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오해가 풀리자 민중은 오히려 저희를 이해하고 신뢰하게 되었고, 학생들의 신앙은 더 뜨거워졌으니까요. 그 시련을 지나며 조선 최초의 여성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 Q. 선교사님 곁에는 늘 조선인 동역자들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 외국인인 제가 다가갈 수 없는 안방에, 조선 여인은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조선 여인이 조선 여인에게’ — 그것이 제 방식이었지요. 버림받은 소녀들을 양딸로 거두어 교사와 전도부인으로 길렀습니다. 이경숙, 여메레, 백헬렌 같은 이들 말입니다. 백헬렌은 방물장수로 변장해 집집을 돌며 물건을 팔면서 복음을 전했지요. 저는 씨를 뿌렸을 뿐, 그 밭을 일군 것은 조선의 여인들이었습니다.
- Q. 노년에도 은퇴를 거부하고 지방을 도셨다지요.
- 일흔이 넘어 병을 얻어 본국에 돌아갔다가, 건강을 되찾고 다시 조선으로 왔습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살아 돌아온 감격이었지요. 제가 늘 되뇐 기도는 시편의 한 구절입니다. ‘노년에도 결실을 주소서.’ 스스로를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자로 낮추었지만, 그저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전도가 되더군요. 마지막 지방 여행에서, 가는 마을마다 예배당 깃발이 나부끼는 것을 보고 저는 울먹이며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 Q. 끝으로, 선교사님이 평생 추구하신 교육이 무엇이었는지 한마디로 들려주십시오.
- 저는 조선 소녀들을 서양인처럼 바꾸려 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인을 보다 나은 한국인으로 만드는 것 — 그것이 제 목표였습니다. 한국식으로 요리하고 옷 짓는 법을 가르쳤고, 조선의 예절을 존중했습니다. 학생들이 조선인임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긍지를 갖기를 바랐지요. 여성도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남성과 평등하며, 배워서 함께 나라의 역사를 책임져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제가 떠나도 그 가르침의 열매는 계속 맺힐 것입니다.
자료 · 출처
- 학생 심화 연구 (드리미학교 박제희)
- 이경숙, 「스크랜튼 선생님의 여성교육정신과 이화여대의 미래비전」
- 『한국을 사랑한 메리 스크랜튼』 (교보문고 도서)
- 메리 스크랜튼 선교보고 서한 및 The Korean Repository·대한크리스도인회보 인용 (학생 노트 재인용)
- 나무위키 ‘메리 스크랜튼’ 항목 (보조 참고)
사실 골격은 학생 심층 연구를 통설·사료와 대조해 정정했습니다(입국 1895년, 목포 첫 예배 1898년, 광주 개척 1904년 등). 삽화는 회화체 AI 일러스트로 실제 사진과 구분해 표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