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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스크랜튼 · 가상 인터뷰

드리미학교 ‘Missionaries from Aunae’ · 박제희 심층 연구

심화 이야기
시나리오 박제희 · 드리미학교 6기영상제작 김현성 · 드리미학교 7기

학생이 메리 스크랜튼의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창작 인터뷰입니다. 실제 발언 기록이 아닙니다.

Q1.안녕하세요. 인터뷰에 앞서 간단히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메리 스크랜튼입니다. 미국 매사추세츠의 목사관에서 태어나, 대대로 강단에 서던 집안에서 자랐지요. 남편을 일찍 여의고 아들을 키우며 여성해외선교회 일을 돕다가, 쉰이 넘어 조선의 개척 선교사로 이 땅에 왔습니다. 정동에서 여학교와 여성 병원을 시작하고, 지방을 돌며 부인들에게 글과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스크랜튼 대부인’이라 불렀지만, 저는 그저 조선 여인들의 스승이고 싶었습니다.
Q2.조선 땅을 밟으셨을 때가 쉰둘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자기 나라에서도 새 도전을 하기 어려운 나이인데, 어떻게 개척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셨는지요.
그 시작은 제가 아니었습니다. 오하이오 레베나의 한 모임에서, 나이 든 부인 한 분이 이름조차 없는 조선의 소녀들을 위해 헌금하겠다고 일어선 일이 있었지요. 그 작은 헌금이 씨앗이 되어 조선 여성 선교의 기금이 모였습니다. 저 자신은 나이를 핑계로 여러 번 사양했습니다만, 여성해외선교회 지도자들의 설득이 어찌나 끈질기던지요. 결국 쉰둘에 임명을 받았습니다. 나이가 많다는 것은, 돌이켜보면 핑계였을 뿐입니다.
Q3.조선 땅을 밟기도 전부터 조선을 사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일본에 머물며 조선말을 배우던 때, 본국에 편지를 이렇게 썼습니다. 이곳 생활도 유쾌하고 선교사들도 잘하고 있지만, 나는 어서 가서 ‘내 백성’ 가운데 살고 싶다고요. 아직 만나 보지도 못한 사람들을 벌써 제 백성이라 부른 셈이지요. 마음이 먼저 그 땅에 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Q4.그 시절 조선은 지금과 비할 수 없이 가난하고 위험한 곳이었다지요. 어떤 마음가짐으로 그 땅에 서셨습니까.
특히 여인들의 처지가 어두웠습니다. 상류층 딸은 규방에 갇혀 있었고, 가난한 집 아이는 사고팔렸습니다. ‘여자는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상식이던 시절이니까요. 위험이 없다고는 못 하겠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저희는 결코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지혜를 넘어서는 약속을 믿었으니까요.
Q5.그렇게 세우신 것이 바로 이화학당이군요. 처음 학교를 여셨을 때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부끄럽지만 학생 하나 구하기가 그토록 어려웠습니다. 첫 학생은 왕비의 통역이 되고 싶어 온 고관의 소실이었는데, 공부에 흥미가 없어 석 달 만에 떠났지요. 제 곁에 오래 남은 첫 학생들은 세상이 버린 아이들이었습니다. 너무 가난해 어머니가 맡긴 아이, 전염병을 앓다 성벽 아래 버려진 아이. 그런 아이들을 데려다 먹이고 재우고 가르치는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다 저희 집에서 관리들을 모신 만찬을 계기로, 왕실이 ‘이화’라는 이름을 내려 주셨지요. 배꽃 학교라는 뜻입니다. 그 뒤로는 부모들이 안심하고 딸을 맡기게 되었습니다.
Q6.이화학당 이후에는 전도와 성경 교육에도 힘쓰셨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앞장서 밀어붙였다기보다, 조선 사람들이 저를 그리로 이끈 편입니다. 토착 여인 둘이 찾아와, 번역된 쪽복음서를 들고 다니며 다른 부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겠다고 했습니다. 어찌 사소한 일이겠습니까. 순이라는 학생은 배운 성경을 부모에게 읽어 주다가, 어느새 병원 사람들까지 모아 놓고 전하고 있었지요. 스스로 임명받은 전도부인이 된 셈입니다. 저는 그저 그 열망에 응답했을 뿐입니다.
Q7.사역 중 가장 큰 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영아 소동’이라 부르던 일이 있었습니다. 서양인이 조선 아이를 유괴한다는 흉흉한 풍문에, 성난 군중이 돌을 던지며 학교와 병원을 부수려 했지요. 종교 활동을 금하는 명까지 내려 집회가 끊겼습니다. 피신할 계획까지 세웠던, 조선에 와서 겪은 첫 시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도리어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오해가 풀리자 민중은 오히려 저희를 이해하고 신뢰하게 되었고, 학생들의 신앙은 더 뜨거워졌으니까요. 그 시련을 지나며 조선 최초의 여성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Q8.선교사님 곁에는 늘 조선인 동역자들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외국인인 제가 다가갈 수 없는 안방에, 조선 여인은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조선 여인이 조선 여인에게’ — 그것이 제 방식이었지요. 버림받은 소녀들을 양딸로 거두어 교사와 전도부인으로 길렀습니다. 이경숙, 여메레, 백헬렌 같은 이들 말입니다. 백헬렌은 방물장수로 변장해 집집을 돌며 물건을 팔면서 복음을 전했지요. 저는 씨를 뿌렸을 뿐, 그 밭을 일군 것은 조선의 여인들이었습니다.
Q9.노년에도 은퇴를 거부하고 지방을 도셨다지요.
일흔이 넘어 병을 얻어 본국에 돌아갔다가, 건강을 되찾고 다시 조선으로 왔습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살아 돌아온 감격이었지요. 제가 늘 되뇐 기도는 시편의 한 구절입니다. ‘노년에도 결실을 주소서.’ 스스로를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자로 낮추었지만, 그저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전도가 되더군요. 마지막 지방 여행에서, 가는 마을마다 예배당 깃발이 나부끼는 것을 보고 저는 울먹이며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Q10.끝으로, 선교사님이 평생 추구하신 교육이 무엇이었는지 한마디로 들려주십시오.
저는 조선 소녀들을 서양인처럼 바꾸려 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인을 보다 나은 한국인으로 만드는 것 — 그것이 제 목표였습니다. 한국식으로 요리하고 옷 짓는 법을 가르쳤고, 조선의 예절을 존중했습니다. 학생들이 조선인임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긍지를 갖기를 바랐지요. 여성도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남성과 평등하며, 배워서 함께 나라의 역사를 책임져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제가 떠나도 그 가르침의 열매는 계속 맺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