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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연구 · 학생 탐구

한국인보다 한국을 사랑한 사람

버몬트의 목사관에서 태어난 청년은 임금의 부름을 받아 조선의 첫 관립학교 교단에 섰고, 한글로 세계를 가르쳤으며, 끝내 이 땅에 묻히기를 청했다.

✍️ 드리미학교 ‘Missionaries from Aunae’ · 김시원 심층 연구

19세기 말 서울 도성 안, 서양식 외투를 입은 이가 기와지붕 너머 남산을 바라보는 뒷모습AI 일러스트
임금의 부름을 받아 조선에 온 젊은 교사. 그는 이 도시를 오래도록 떠나지 못했다. · AI 생성 일러스트(회화체 재구성)
호머 헐버트 초상

호머 헐버트

Homer B. Hulbert

육영공원의 교사, 한글의 벗, 그리고 조선의 밀사.

본명
Homer Bezaleel Hulbert (한국명 흘법訖法·할보轄甫)
생몰
1863–1949
입국
1886년, 육영공원 교사로
거점
서울(한성)
사역
육영공원 교육 · 한글 저술(사민필지) · 한국사 연구 · 독립운동(헤이그 특사)
잠든 곳
서울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 미국 버몬트주 뉴헤이븐의 목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캘빈 헐버트는 회중교회 목사이자 대학 총장을 지냈고, 형제들도 학문과 목회의 길을 걸었다. 형 아처 헐버트는 역사학자로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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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버몬트의 초록빛 언덕, 눈이 오래 머무는 북부의 작은 마을에 목사의 아들이 있었다. 집안은 대대로 배움과 신앙을 가까이 두었고, 그는 다트머스 대학을 거쳐 신학교에 들어갔다. 조선이라는 이름은 그때까지 그의 삶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1886년, 스물세 살의 청년은 태평양을 건너 한성에 닿았다. 조선의 임금이 서양의 학문을 가르칠 교사를 청했기 때문이다. 그는 왕립학교의 교단에 섰고, 이후 반세기 가까이 이 나라의 말과 역사와 운명에 자신을 붙들어 매게 된다. 뒷날 그는 이렇게 적었다고 전해진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

목사관의 아들

미국 버몬트 북부의 눈 덮인 언덕과 흰 첨탑의 회중교회, 멀리 작은 인영AI 일러스트
버몬트의 목사관. 배움과 신앙이 늘 함께이던 집이었다. · AI 생성 일러스트(회화체 재구성)

호머 베잘리엘 헐버트는 1863년, 미국 버몬트주 뉴헤이븐에서 태어났다. 남북전쟁의 포성이 아직 대륙을 갈라놓던 해였다. 아버지 캘빈 헐버트는 회중교회 목사이자 훗날 대학 총장을 지낸 이였고, 집안에는 설교와 책과 토론이 늘 함께였다.

그는 다트머스 대학에서 공부한 뒤 뉴욕 유니언 신학교에 들어갔다. 목회자의 길이 그의 앞에 자연스럽게 놓여 있었다. 그러나 신학교 재학 중, 조선이라는 낯선 나라가 서양인 교사를 구한다는 소식이 그의 삶의 방향을 돌려놓는다.

무엇이 젊은 신학생을 지구 반대편의 은둔국으로 이끌었는지, 그 마음의 자세한 결은 지금 다 헤아리기 어렵다. 다만 그는 학업을 잠시 접고 그 부름에 응했고, 그 결정은 한 사람의 일생을 넘어 한 나라의 이야기 속으로 그를 데려갔다.

임금이 부른 교사 — 육영공원

1880년대 한성의 관립학교 마당, 도포 차림 학생들과 서양식 옷의 교사 뒷모습AI 일러스트
육영공원. 조선이 세운 첫 근대식 관립학교의 교단에 그가 섰다. · AI 생성 일러스트(회화체 재구성)

1886년, 조선 정부는 서양의 근대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관립학교 육영공원(育英公院)을 열었다. 미국에 교사 파견을 요청했고, 헐버트는 델젤 벙커, 조지 길모어와 함께 조선으로 왔다. 세 명의 젊은 미국인이 조선 왕조가 세운 첫 근대식 관립학교의 교단에 선 것이다.

육영공원의 학생은 대개 양반 자제와 젊은 관리였다. 서양의 지리와 수학, 역사와 자연과학을 영어로 가르치는 실험적인 학교였다. 그러나 학교는 오래가지 못했다. 학생들의 학업 의지가 무르고, 관리들의 지원과 운영이 흔들리면서, 육영공원은 몇 해 만에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고 전해진다.

헐버트는 학교의 한계에 부딪히면서도 조선어를 익히는 데 놀라운 열의를 보였다. 그는 몇 해 만에 조선말을 상당히 자유롭게 구사하게 되었고, 이 언어에 대한 애정은 곧 그의 가장 큰 업적으로 이어진다.

감리회 선교사로 다시 조선에

육영공원을 떠나 잠시 미국으로 돌아갔던 헐버트는, 1893년 무렵 미국 북감리회의 선교사 신분으로 다시 조선에 돌아왔다. 이번에는 정부에 고용된 교사가 아니라, 교회의 파송을 받은 선교사로서였다.

그는 배재학당의 교육과 감리회의 출판 사업에 힘을 보탰다. 서양의 인쇄술과 근대적 지식을 조선에 들여오는 일, 그리고 조선의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그에게 늘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헐버트를 여느 선교사와 나란히 두기는 어렵다. 그의 사역은 교회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교실과 편집실을 넘어, 이 나라의 언어와 역사, 끝내는 그 운명에까지 자신을 걸었다.

한글로 세계를 그리다 — 사민필지

책상 위 한글 목판 인쇄 교과서와 세계지도, 등잔불 아래 필사하는 손AI 일러스트
『사민필지』. 세계라는 무대를 한글로 열어 보였다. · AI 생성 일러스트(회화체 재구성)

조선말을 익히던 헐버트는 곧 이 나라 사람들의 문자, 한글에 놀란다. 그는 한글이 세상 어느 문자보다 과학적이고 배우기 쉬운 글자라고 여겼다. 그러면서도 지식층이 한자만을 높이고 한글을 낮추어 보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1889년 무렵, 그는 순 한글로 된 세계지리 교과서 『사민필지(士民必知)』를 펴냈다. ‘사민’, 곧 선비와 백성 모두가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이라는 뜻이다. 이 책은 오대양 육대주의 지리와 각국의 풍속, 정치와 산업을 한글로 담아냈다. 한글로 쓰인 최초의 근대 교과서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사민필지』는 단순한 지리책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계라는 넓은 무대를 조선의 백성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글자로 열어 보인 사건이었다. 헐버트는 이후에도 한글의 우수성을 세계 학계에 알리는 글을 발표하며, 한글 연구의 선구자로 남았다.

아리랑을 오선지에 옮기다

헐버트는 조선의 노래에도 귀를 기울였다. 그는 백성들이 부르던 민요 ‘아리랑’을 서양식 오선 악보로 채보해 소개했다고 전해진다. 구전으로만 흘러 다니던 가락을 기록으로 붙든, 이른 시도 가운데 하나였다.

그에게 조선은 연구하고 사랑해야 할 하나의 온전한 문화였다. 언어와 역사, 음악과 풍속, 그 모든 것이 기록되고 존중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그는 조선을 미개한 은둔국으로 낮추어 보던 당대 서양의 시선에 맞서, 이 나라의 문화적 깊이를 부지런히 세상에 알렸다.

잡지를 만들고 역사를 쓰다

1900년대 서울의 인쇄소, 영문 잡지 활판과 원고 더미, 창가에 선 인영AI 일러스트
『The Korea Review』. 그는 붓과 인쇄기로도 조선을 위해 일했다. · AI 생성 일러스트(회화체 재구성)

헐버트는 붓과 인쇄기로도 조선을 위해 일했다. 그는 영문 월간지 『The Korea Review』를 펴내며 조선의 정치와 문화, 세계정세를 안팎에 전했다. 이 잡지는 나라 밖에서 한국을 이해하려는 이들에게 귀한 창이 되었다.

그는 또한 방대한 한국사 연구서 『The History of Korea』와 『The Passing of Korea(대한제국 멸망사)』를 남겼다. 특히 후자는 기울어 가는 대한제국의 마지막을 서양 독자에게 증언한 책으로, 서문에서 그는 이 책을 한국의 임금과 백성에게 바친다고 적었다.

학자로서의 그와 벗으로서의 그는 나뉘지 않았다. 그는 연구하면 할수록 이 나라를 더 사랑하게 되었고, 사랑할수록 더 깊이 연구했다. 그의 저술은 오늘날에도 개항기 한국을 이해하는 소중한 사료로 남아 있다.

은둔국을 향한 서양의 시선에 맞서

당대의 서양은 조선을 흔히 미개하고 정체된 은둔국으로 그렸다. 헐버트는 이런 편견에 학문으로 맞섰다. 그는 조선이 오랜 역사와 정교한 문화, 세계 최고 수준의 문자를 지닌 나라임을 거듭 증언했다.

그의 글에는 조선을 향한 존중이 배어 있었다. 그는 이 나라가 스스로의 힘으로 근대의 문턱을 넘을 수 있다고 믿었고, 다만 그럴 시간이 주어지기를 바랐다. 그의 학문은 결국 조선의 자존을 지키려는 또 하나의 싸움이기도 했다.

고종의 밀사

20세기 초, 대한제국은 일본의 압박 아래 국권을 잃어 가고 있었다. 이 위태로운 시기, 헐버트는 교사이자 학자를 넘어 고종 황제가 가장 신뢰하는 서양인 조력자가 되었다. 황제는 나라 밖 세계에 조선의 처지를 호소할 통로로 그를 택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된 전후, 헐버트는 고종의 친서를 지니고 미국으로 건너가 조약의 부당함을 알리려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미 열강의 셈법 속에서 대한제국의 목소리는 좀처럼 자리를 얻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한 이방인이 자신의 조국이 아닌 나라를 위해 이토록 위험을 감수한 일은, 당대에도 드문 것이었다.

헤이그, 세 사람의 특사 곁에서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의 벽돌 거리, 회의장 앞에 선 동양인 특사들과 서양인 조력자의 먼 뒷모습AI 일러스트
헤이그, 1907년. 문 앞에서 가로막힌 약소국의 호소. · AI 생성 일러스트(회화체 재구성)

1907년, 고종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보내 을사늑약의 무효를 세계에 알리고자 했다. 이준, 이상설, 이위종 세 특사가 은밀히 파견되었고, 헐버트 역시 별도의 경로로 헤이그로 향하며 이들의 활동을 도왔다고 전해진다.

특사들은 회의장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일본의 방해와 열강의 외면 속에서, 나라 잃어 가는 약소국의 호소는 문 앞에서 가로막혔다. 이준 특사는 그곳에서 순국했다. 그러나 세 특사와 그 곁의 이방인이 세계 언론 앞에서 외친 절규는 헛되지 않았다.

헤이그 사건 이후 헐버트는 일본에 의해 사실상 조선에서 추방되다시피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를 아끼던 임금은 폐위되었고, 그가 사랑하던 나라는 곧 국권을 완전히 빼앗겼다.

먼 나라에서의 오랜 기다림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헐버트는 한국을 잊지 않았다. 그는 강연과 기고를 통해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고, 일제의 부당한 지배를 미국 사회에 알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삼일운동과 그 이후에도 그는 한국의 벗으로 남았다.

그러나 세월은 길었다. 조선에 처음 발을 디딘 청년은 어느새 노인이 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 다시 한국 땅을 밟기를 원했지만, 식민지가 된 조국은 그를 쉬이 받아 주지 못했다. 그는 태평양 건너에서 광복의 날을 기다렸다.

웨스트민스터보다 한국에 — 양화진의 흙

서울 양화진 강가 언덕의 외국인 묘원, 십자가 비석들과 강 건너 풍경, 홀로 선 인영AI 일러스트
양화진. 그는 소원대로 이 땅의 흙이 되었다. · AI 생성 일러스트(회화체 재구성)

1945년, 마침내 한국이 해방되었다. 그리고 1949년, 대한민국 정부는 여든여섯의 노인이 된 헐버트를 국빈으로 초청했다. 그는 반세기 만에, 그토록 그리던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나 오랜 여정과 고령의 몸은 재회의 기쁨을 오래 누리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내한한 지 며칠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여든여섯이었다. 그는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

그 소원대로, 그는 서울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묻혔다. 조선의 임금을 위해 세계를 누비던 이방인은, 끝내 이 땅의 흙이 되었다. 대한민국은 그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하여 그 헌신을 기렸다.

한국을 사랑한다는 것

헐버트의 삶은 하나의 물음을 남긴다. 자신의 조국이 아닌 나라를 이토록 오래, 이토록 깊이 사랑한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는 조선의 말을 배웠고, 조선의 역사를 썼으며, 조선의 독립을 위해 위험을 감수했고, 조선의 흙에 묻혔다.

그는 흔히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사람’으로 불린다. 그것은 과장이 아니라, 한 이방인이 평생에 걸쳐 증명한 사실에 가깝다. 그의 사랑은 감상이 아니라 노동이었다. 교과서를 쓰고, 잡지를 펴내고, 밀사가 되어 바다를 건너는, 구체적이고 고단한 노동이었다.

오늘 한글로 세계를 배우는 이들, 개항기의 역사를 사료로 읽는 이들은 알게 모르게 그의 손길에 빚지고 있다. 버몬트의 목사관에서 태어난 한 청년이 남긴 그 빚을, 우리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일로 조금씩 갚아 간다.

가상 인터뷰

학생이 호머 헐버트의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창작 인터뷰입니다. 실제 발언 기록이 아닙니다.

Q. 안녕하세요. 인터뷰에 앞서 간단히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나는 호머 헐버트입니다. 미국 버몬트의 목사 집안에서 태어나 신학을 공부하다가, 스물세 살에 조선의 부름을 받고 이 나라에 왔습니다. 육영공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한글로 책을 쓰고, 이 나라의 역사를 정리하고, 끝내는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조금이나마 애썼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선교사이자 교사, 학자라 부르지만, 나 스스로는 그저 한국의 벗이고 싶었습니다.
Q. 낯선 조선까지 오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신학교에 다니던 무렵, 조선이 서양 학문을 가르칠 교사를 구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그 나라가 지도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몰랐습니다. 다만 젊은 마음에, 아무도 가려 하지 않는 먼 곳에 내가 쓰일 자리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태평양을 건넜고, 그 결정이 내 평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Q. 육영공원에서의 나날은 어떠셨습니까?
조선 임금이 세운 첫 근대식 관립학교였으니, 그 자체로 뜻깊은 일이었습니다. 양반 자제와 젊은 관리들에게 지리와 역사, 수학을 영어로 가르쳤지요. 다만 솔직히 말하면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학생들의 배움에 대한 열의도 고르지 않았고, 학교를 떠받쳐야 할 지원도 흔들렸습니다. 학교는 오래가지 못했지만, 나는 그곳에서 조선말을 얻었습니다. 그것이 가장 큰 소득이었습니다.
Q. 『사민필지』는 어떻게 쓰시게 되었습니까?
조선말을 배우면서 나는 이 나라의 글자에 놀랐습니다. 한글은 세상에서 가장 배우기 쉽고 과학적인 문자입니다. 그런데 정작 조선의 지식층은 한자만 높이고 한글을 낮추어 보더군요. 나는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선비든 백성이든 누구나 세계를 알 수 있도록, 순 한글로 세계지리 교과서를 썼습니다. 세계라는 넓은 곳을, 조선 사람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글자로 열어 보이고 싶었습니다.
Q. 조선의 노래까지 악보로 남기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백성들이 부르던 아리랑을 서양식 악보에 옮겨 보았습니다. 입에서 입으로만 흘러 다니던 가락이 언젠가 사라질까 아까웠으니까요. 나에게 조선은 연구할 대상이 아니라 사랑할 문화였습니다. 언어와 역사, 음악과 풍속 모두가 기록되고 존중받아 마땅한 것이었습니다.
Q. 임금의 밀사가 되신 일은 두렵지 않으셨습니까?
왜 두렵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나라를 잃어 가는 이의 곁에서 세계를 향해 목소리를 내 줄 사람이 필요했고, 마침 나에게 그 언어와 그 통로가 있었습니다. 고종 황제께서 나를 믿어 주셨으니, 나는 그 신뢰를 저버릴 수 없었습니다. 이방인인 내가 감당할 몫이 있다면, 기꺼이 감당하려 했습니다.
Q. 헤이그에서의 일을 돌아보면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쓰라립니다. 세 분의 특사와 함께 온 세계에 조선의 억울함을 알리려 했지만, 우리는 회의장 문 앞에서 가로막혔습니다. 이준 특사께서는 그 먼 땅에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힘없는 나라의 진실은 문턱을 넘지 못하더군요. 그러나 나는 지금도 믿습니다. 그날의 외침이 아주 헛되지는 않았다고. 진실은 언젠가 제 자리를 찾습니다.
Q. 조선에서 추방되다시피 미국으로 돌아가신 뒤에는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몸은 미국에 있었지만 마음은 늘 한국에 있었습니다. 강연을 하고 글을 쓰며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습니다. 다시 그 땅을 밟고 싶었지만, 식민지가 된 나라는 나를 쉽게 받아 주지 못했습니다. 그저 기다렸습니다. 언젠가 그 나라가 다시 제 이름을 되찾는 날을, 아주 오래 기다렸습니다.
Q. 그토록 한국을 사랑하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글쎄요. 사랑에 반드시 까닭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다만 배우면 배울수록 이 나라를 더 사랑하게 되었고, 사랑할수록 더 깊이 배우게 되었다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사랑은 감정이라기보다 하나의 일이었습니다. 책을 쓰고, 잡지를 펴내고, 바다를 건너는 일 말입니다.
Q. 마지막으로 오늘의 한국 사람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지요.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이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했고, 다행히 그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여러분이 한글로 세계를 배우고 여러분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긴다면, 나는 그것으로 족합니다. 부디 여러분의 나라를, 내가 사랑했던 것보다 더 깊이 사랑해 주십시오.

자료 · 출처

  • 드리미학교 ‘Missionaries from Aunae’ 심층 연구 노트(김시원) — 초기 개신교 선교사 일반 연구
  • Homer B. Hulbert, 『The Passing of Korea(대한제국 멸망사)』
  • Homer B. Hulbert, 『The History of Korea』
  • Homer B. Hulbert, 『사민필지』(1889)
  •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자료 및 통설 정리
  •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안내 자료

사실 골격은 학생 심층 연구를 통설·사료와 대조해 정정했습니다(입국 1895년, 목포 첫 예배 1898년, 광주 개척 1904년 등). 삽화는 회화체 AI 일러스트로 실제 사진과 구분해 표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