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media Commons21세에 최연소 선교사로 입국해 제물포(인천)를 거점으로 사역한 미감리회 선교사. 1892년 내리교회 담임으로 부임해 영화학교를 세우고 인천·강화 일대에 수십 개 교회를 개척했으며, 『신학월보』를 창간하고 『코리안 리포지터리』를 편집한 한국학·문서선교의 개척자다.
조지 허버 존스는 뉴욕의 작은 도시에서 자란 청년이었다. 스무 살을 갓 넘긴 1888년, 그는 미감리회가 보낸 선교사 가운데 가장 어린 나이로 조선 땅을 밟았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청년이 낯선 나라의 말과 사람들 앞에 선 셈이었다.
처음 얼마간 그는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의 자리가 정해진 곳은 서울이 아니라 바닷가의 항구 도시 제물포였다. 1892년, 그는 인천 내리교회의 담임으로 부임했다. 부임하자마자 그는 영화학교를 세웠다. 제물포에서 아이들이 처음으로 근대식 배움을 만난 자리였다.
그는 교회 하나에 머무르지 않았다. 인천에서 강화로, 부평으로, 남양으로, 그는 길을 걸어 다니며 작은 신자의 모임들을 교회로 키워 갔다. 전해지는 바로 그가 개척한 교회는 1903년까지 마흔 곳을 넘었고, 세례를 받은 이는 수천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그를 단지 부지런한 전도자로만 기억하기는 어렵다. 그는 한국을 ‘가르칠 대상’이 아니라 ‘배워야 할 나라’로 대한 드문 사람이었다. 한국의 역사와 종교와 말을 깊이 파고들어, 영문 잡지 『코리안 리포지터리』와 『코리아 리뷰』에 그 연구를 실어 세계에 알렸다. 1900년에는 제물포에서 한국어 신학지 『신학월보』를 창간했다. 한국인이 한국말로 신학을 읽고 쓰는 길을 연 것이다.
그의 제물포 교회에서 자란 교인들 가운데 많은 이가, 1902년 겨울 하와이로 떠나는 첫 이민선에 올랐다. 복음이 이 땅에 닿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복음을 품은 사람들이 다시 바다를 건너간 것이다. 한국 교회는 그렇게 일찍부터 국경 너머로 이어졌다.
오랜 사역 끝에 그는 병을 얻어 고국으로 돌아갔고, 1919년 세상을 떠났다. 가장 어린 나이로 들어와 가장 부지런히 한국을 배운 사람. 그가 남긴 교회와 학교와 잡지는, 한 청년이 낯선 나라를 끝까지 사랑하기로 한 데서 비롯되었다.
가장 어린 나이로 들어와 가장 부지런히 한국을 배운 사람. 그는 한국을 연구해 세계에 변호했고, 끝내 병을 얻어 고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한국을 마음에서 내려놓지 않았다.
- 1888년 21세에 미감리회 최연소 선교사로 입국 — 처음에는 배재학당에서 가르침
- 1892년 제물포(인천) 내리교회 담임으로 부임, 영화학교를 세워 제물포 지역 근대교육을 엶
- 인천·강화·부평·남양 등지를 순회하며 1903년까지 수십 개 교회를 개척하고 수천 명에게 세례를 베풂
- 1900년 제물포에서 한국어 신학지 『신학월보』를 창간 — 한국인을 위한 신학 문서선교의 출발
- 영문지 『코리안 리포지터리』·『코리아 리뷰』를 편집하며 한국의 역사·종교·언어를 학문적으로 연구해 세계에 알림
그가 세운 내리교회와 영화학교는 인천 기독교와 근대교육의 뿌리가 되었고, 『신학월보』는 한국인 스스로 신학을 읽고 쓰는 길을 열었다. 그의 교회에서 자란 교인 다수가 1902년 첫 하와이 이민 길에 올라, 한국 교회는 일찍부터 바다 건너로 이어졌다.
연표
- 1888
21세에 최연소 선교사로 입국
- 1892
제물포 내리교회 부임 — 영화학교 설립
- 1900
제물포에서 『신학월보』 창간
- 1903
인천·강화 등 44개 교회 개척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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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aries from Aunae (Dreamy School). 「조원시(존스) (George Heber Jones, 1867–1919)」. https://missionaries-khaki.vercel.app/people/jones (열람: 2026. 7. 4.)
조원시(존스)의 삶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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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면 무엇에 내 삶의 값을 치르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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