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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암 · 가상 인터뷰

드리미학교 ‘Missionaries from Aunae’ · AI 재현 인터뷰

시나리오 이한결 · 드리미학교 7기영상제작 이한결 · 드리미학교 7기

학생(이한결)이 우리암(F.E.C. Williams) 선교사의 생애와 사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가상 인터뷰입니다. 실제 발언 기록이 아닙니다.

Q1.선교사님, 먼저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미국 콜로라도에서 태어난 미감리회 선교사 프랭크 윌리엄스입니다. 조선에서는 ‘우리암’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1906년에 조선에 들어와 이듬해 충청 내륙의 공주에 자리를 잡았고, 그곳 영명학교에서 30여 년을 지냈습니다.
Q2.공주에 부임하셨을 때의 상황이 쉽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랬습니다. 제가 맡아야 할 학교의 전임자였던 사부수(로버트 샤프) 선교사가,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난 직후였습니다. 스물넷의 저에게 남겨진 것은 이름뿐인 학교와, 스승을 잃은 학생들이었습니다. 막막했지만, 저는 그 빈자리를 그대로 이어받기로 했습니다.
Q3.그 학교가 바로 공주 영명학교였군요.
네. 흩어질 뻔한 배움의 터를 다시 모으고, 건물을 세우고, 교과를 하나씩 갖추어 나갔습니다. 그렇게 다시 일으킨 학교가 공주 영명학교, 충남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죽음으로 끊길 뻔한 일을 다른 한 사람이 이어받아 비로소 뿌리를 내린 셈이지요.
Q4.학교를 어떤 곳으로 키우고 싶으셨습니까?
저는 학교를 단순한 교육기관 이상으로 키우고 싶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몸 바치는 애국자를 기르자’—그것이 우리가 내건 뜻이었습니다. 선교사가 세운 학교였지만, 그 안에서 자라난 것은 신앙만이 아니라 민족의식이었습니다. 일제의 감시 아래에서 그런 교육을 한다는 것이 어떤 무게의 일이었는지는, 그 시대를 떠올려 보시면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Q5.맏아들의 이름에도 그 마음을 담으셨다고요.
1907년 인천에서 태어난 맏아들의 이름을 저는 ‘우광복(光福)’이라 지었습니다. 빛 광, 복 복—곧 조선의 해방을 바라는 염원을 담은 이름이었습니다. 제 나라가 아닌 땅의 자유를, 저는 자식의 이름으로 빌었습니다.
Q6.영명학교에서 자란 학생들을 생각하면 어떠십니까?
저와 같은 공주 선교부에서 사애리시 선생이 여학생들을 길렀고, 그 배움의 터에서 훗날 나라를 위해 몸을 던진 아이들이 자라났습니다. 유관순도 그 공주의 학교에서 첫걸음을 뗀 사람입니다. 제가 그들을 만들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아이들이 자랄 자리를 지키는 것, 그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Q7.30여 년의 세월이 끝내 끊기고 말았습니다.
1940년, 일제는 저를 강제로 추방했고 학교는 1942년 끝내 문을 닫았습니다. 평생을 들여 세운 일이 눈앞에서 막을 내리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조선을 마음에서 놓지 못했습니다. 이후 인도 전선에서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 대원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떠난 뒤에도 그 독립의 불씨를 조금이나마 잇고자 했습니다.
Q8.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으실까요?
저는 1962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제가 눈을 감은 지 61년이 지난 2023년, 대한민국은 저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습니다. 광복절 경축식에서 그 포장을 받은 것은 저의 증손녀였습니다. 한 이방의 선교사가 남의 나라 아이들에게 끝내 가르치려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너무 늦게 도착한 그 훈장이 조용히 되물어 준다면, 저는 그것으로 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