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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암

Frank E. C. Williams · 1883–1962 · 미국

북감리회교육 · 전도공주

미감리회 선교사로 1906년 입국, 이듬해 공주에 부임해 1940년까지 한 지역에서 가장 오래 사역했다. 전임자 사부수 사후 학교를 인수·재건하여 충남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인 공주 영명학교를 세우고 교장으로서 민족교육을 고취했다. 2023년 광복절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이야기

우리암은 미국 콜로라도에서 태어나 미감리회 선교사로 조선에 왔다. 1906년 입국한 그가 이듬해 부임한 곳은 충청 내륙의 공주였다. 스물넷의 청년 선교사 앞에 놓인 것은 막막한 상황이었다. 그가 맡아야 할 학교의 전임자 사부수가,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난 직후였기 때문이다.

남겨진 것은 이름뿐인 학교와, 스승을 잃은 학생들이었다. 우리암은 그 자리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흩어질 뻔한 배움의 터를 다시 모으고, 건물을 세우고, 교과를 갖추어 나갔다. 그렇게 다시 일으킨 학교가 공주 영명학교, 충남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이었다. 한 사람의 죽음으로 끊길 뻔한 일을, 다른 한 사람이 이어 받아 비로소 뿌리를 내린 셈이다.

교장이 된 우리암은 학교를 단순한 교육기관 이상으로 키워갔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몸 바치는 애국자를 기르자'는 뜻을 교훈으로 내걸었다고 전해진다. 선교사가 세운 학교였으나, 그 안에서 자라난 것은 신앙만이 아니라 민족의식이었다. 일제의 감시 아래에서 민족교육을 고취한다는 것이 어떤 무게의 일이었는지는, 그 시대를 떠올려 보면 짐작할 수 있다.

그의 마음은 아들의 이름에도 새겨졌다. 1907년 인천에서 태어난 맏아들의 이름을 그는 우광복(光福)이라 지었다. 빛 광에 복 복, 곧 조선의 해방을 바라는 염원을 담은 이름이었다. 자기 나라가 아닌 땅의 자유를 자식의 이름으로 빌었던 한 아버지의 마음을, 그 이름 석 자가 조용히 증언한다.

영명학교에서 보낸 30여 년의 세월은 1940년에 끊겼다. 일제는 그를 강제로 추방했고, 학교는 1942년 끝내 문을 닫았다. 평생을 들여 세운 일이 눈앞에서 막을 내리는 것을 그는 지켜보아야 했다. 이후 그가 인도 전선에서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 대원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독립의 불씨를 이어가려 했다고 전해지는 것은, 떠난 뒤에도 그 마음이 조선을 떠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우리암은 1962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가 눈을 감은 지 61년이 지난 2023년, 대한민국은 그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광복절 경축식에서 포장을 받은 것은 그의 증손녀였다. 한 외국인 선교사가 남의 나라 아이들에게 가르치려 했던 것이 끝내 무엇이었는지를, 너무 늦게 도착한 그 훈장이 조용히 되묻는다.

입국 연도
1906년 (공주 부임 1907년)
소속
미감리회(북감리회)
사역
교육 · 전도 — 영명학교 설립·교장
대표 업적
공주 영명학교 설립 · 2023 건국포장 추서

연표

  1. 1906

    미감리회 선교사로 입국

  2. 1907

    공주 부임, 1909년 영명학교 인가

  3. 1940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 미국으로 귀환

  4. 2023

    건국포장 추서(사후 61년)

관계

관련 영상

2022년 8월의 역사인물, ‘선교사 우리암’ · 공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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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aries from Aunae (Dreamy School). 「우리암 (Frank E. C. Williams, 1883–1962)」. https://missionaries-khaki.vercel.app/people/williams (열람: 2026.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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