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생이 로제타 셔우드 홀의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창작 인터뷰입니다. 실제 발언 기록이 아닙니다.
- Q1.선교사님의 어린 시절과 조선에 오시기 전의 삶이 궁금합니다. 어떤 분이시며, 언제 어디에서 사역하셨나요?
- 저는 미국 뉴욕주 리버티에서 태어나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조선으로 파송되었습니다. 조선의 여성과 어린이들을 위한 의료·교육 사역에 힘썼고, 서울의 보구여관과 동대문 진료소, 그리고 평양의 기홀병원에서 일했습니다. 훗날에는 어린 시절 배운 점자를 바탕으로 시각장애 아이들을 위한 교육도 펼쳤습니다.
- Q2.스무 살 남짓에 조선으로 떠나신 그 믿음과 사명감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나요?
- 무엇보다 가정의 영향이 컸습니다. 아버지는 신실한 감리교인으로, 음주 절제와 노예제 반대 운동에 몸을 실으며 믿음을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사셨어요. 어머니는 늘 가족을 위해 기도하시고, 먼 선교지의 저에게 긴 편지를 보내 주셨지요. 특히 어머니가 어릴 적 선교사 엘리자 애그뉴를 만난 이야기를 들으며, 저 역시 의료 선교사의 꿈을 품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에게서는 행동하는 믿음을, 어머니에게서는 헌신과 사랑을 배운 셈입니다.
- Q3.편안한 미국을 떠나 수많은 나라 중에서도 조선을 택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 단지 새 나라에 대한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의과대학 시절 여러 의료 선교사의 강연을 들으며, 복음과 의술을 함께 전하는 삶에 깊이 감동했어요. 인도에서 일하던 애나 존스 토번의 이야기가 특히 제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당시 조선은 의료 혜택이 매우 부족했고, 여성들은 남성 의사에게 진료받기 어려운 환경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서 여성을 위한 의사로 저를 부르신다고 느꼈고, 누군가는 가야 했기에 그 부르심에 순종하고 싶었습니다.
- Q4.보구여관에 처음 도착했을 때 어떤 마음이 드셨고, 사역하며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 처음에는 무척 설레고 감사했습니다. 일기에도 ‘나를 위해 준비된 모든 것이 꼭 맞는다’고 적었지요. 하지만 현실은 훨씬 어려웠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언어와 인력 부족이었어요. 간호사도 약사도 충분치 않아, 체온과 맥박을 재고 약을 짓고 수술과 진료까지 대부분 직접 감당해야 했습니다. 사흘 동안 쉰 명 남짓을 돌보느라 조선어 수업을 빼먹은 적도 있었지요. 환자의 고통을 더 깊이 이해하고 싶은데 말을 자유롭게 나눌 수 없다는 사실이 가장 속상했습니다.
- Q5.그렇게 바쁜 중에도 한국어 공부를 병행하셨습니다. 어떻게 감당하셨나요?
- 정말 힘들었습니다. 한 달에 한국어 수업을 여섯 번밖에 듣지 못할 때도 있었으니까요. 그때마다 우선순위를 생각했습니다. 언어 습득이 먼저인지, 환자의 진료가 먼저인지 말이에요. 고린도전서 13장과 14장을 읽으며 답을 얻었습니다. 여러 언어를 말하는 것보다 사랑이 우선이라는 말씀이었지요. 그 사랑의 실천이란 결국 찾아오는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 주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 Q6.사랑하는 남편 윌리엄 홀 선교사님을 평양에서 잃으셨습니다. 그 큰 슬픔 속에서도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신 힘은 무엇이었나요?
- 한 영혼을 잃는다는 것은 정말 견디기 어려운 슬픔이었습니다. 1894년, 평양에서 남편이 말라리아와 발진티푸스로 세상을 떠났을 때, 저는 아직 어린 두 아이의 어머니였고 낯선 땅에 홀로 남겨진 사람이었지요. 잠시 미국으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님께서 제게 맡기신 사명이 더 분명해졌어요. 남편은 생전에 ‘조선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땅’이라 자주 말했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사명이 끝난 것이 아니라 제가 이어받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눈물 없는 날은 없었지만, 하나님과 아이들을 보며 다시 걸을 수 있었습니다.
- Q7.우리나라 최초로 특수교육을 시도하셨습니다. 특별히 그 일에 마음을 두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 1894년 평양에 첫발을 디딘 직후였습니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 장애를 가진 이들은 ‘천치’로 취급받았고, 시각장애인은 점쟁이나 무당이 되는 것이 그나마 낫다고 여겨졌지요. 그런 현실을 보며 저도 모르게 그들에게 더 마음이 쓰였습니다. 이들을 돕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육이 필요하다고 믿게 되었고, 그때부터 언젠가 스스로 특수교육을 펼치고 싶다는 열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 Q8.특수교육을 끝내 세우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합니다. 그 두려움을 어떻게 이겨내셨나요?
-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개념을 이해시킬 자신도 없었고, 자칫 오해를 살까 두려워 선뜻 엄두를 내기 어려웠지요. 그러나 봉래를 만난 뒤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봉래는 제게 처음 한글 점자를 배운 시각장애 소녀인데, 처음에는 무척 힘들어했지만 점자의 구조를 터득한 뒤로는 읽기를 배우고 곧 받아쓰기까지 해냈습니다. 그 아이가 자기 몫의 영역을 찾아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저도 더없이 행복했어요. 그렇게 1900년 1월, 맹인 소녀 네 명과 함께 이디스 마거릿 병동의 방 한 칸에서 특수교육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 Q9.박에스더를 비롯해 여러 조선 여성을 ‘내 아이들’이라 부르며 길러 내셨습니다. 그들에게 바란 것은 무엇이었나요?
- 제 사명은 조선의 여성들을 몸의 아픔에서 구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교육을 통해 하나님 안에서 주체성을 회복하고, 세상에 유용하게 쓰이는 존재로 세우고 싶었습니다. ‘여성을 위한 여성의 일’, 그것이 우리 선교회의 모토였지요. 열네 살 김점동은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가 되었고, 걷지 못하던 복업은 최초의 정식 간호사 이그레이스가 되었습니다. 이 아이들이 스스로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이 제게는 가장 큰 기쁨이었습니다.
- Q10.미국인이면서도 조선인 못지않게 조선을 사랑하셨습니다. 오늘의 청소년과 그리스도인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 저는 믿음이란 머무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이름 없이 잊힌 이들, 아파도 갈 곳 없는 이들, 배우고 싶어도 문이 닫힌 이들 — 그들의 곁으로 한 걸음 다가가는 것, 그것이 사랑의 시작이라 믿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이 크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거울을 든 채 제 수술을 지켜보던 그날처럼, 두려움 앞에서 눈을 감지 않는 용기 하나면 충분합니다. 낮은 자리의 한 사람을 진심으로 섬기는 일에서, 여러분의 소명은 시작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