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화 연구 · 학생 탐구
이름 없는 이들에게 이름을 — 로제타 셔우드 홀
미국 뉴욕 리버티의 농장에서 자란 한 여의사가, 조선 여성과 아이들에게 몸의 치유와 배움의 길을 함께 놓았다. 그 여정은 남편의 무덤을 지나 평양의 맹인 소녀들에게로 이어졌다.
✍️ 드리미학교 ‘Missionaries from Aunae’ · 전서연 심층 연구
AI 일러스트
로제타 홀
Rosetta S. Hall한국 여성 의학교육의 길을 연 ‘한국 여의사의 어머니’.
- 본명
- Rosetta Sherwood Hall (한국명 홀·허을)
- 생몰
- 1865–1951
- 입국
- 1890년 (25세), 북감리회 여성해외선교회 파송
- 거점
- 서울 보구여관·동대문 볼드윈 진료소 / 평양 기홀병원·광혜여원
- 사역
- 여성의료, 맹아·농아 교육, 조선 여의사 양성
- 잠든 곳
- 서울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
👨👩👧 남편 윌리엄 제임스 홀(의료 선교사, 1894년 평양 사역 중 별세), 아들 셔우드 홀(훗날 조선의 결핵 퇴치에 헌신), 딸 이디스 마거릿(어려서 잃음 — 평양의 병동에 그 이름을 남겼다).
인물 상세 페이지 →미국 뉴욕주의 시골 리버티에, 말을 기르고 넓은 밭을 가꾸던 농장이 있었다. 신실한 감리교도였던 아버지 로즈벨트 셔우드는 음주 절제와 노예제 반대 운동에 몸을 실었고, 그의 농장은 노예들이 자유를 찾아 캐나다로 가던 지하철도(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가 잠시 쉬어 가는 역이기도 했다. 그 집에서 1865년 가을에 한 딸이 태어났다. 로제타 셔우드였다.
행동으로 믿음을 증명한 아버지와, 먼 선교지의 소식에 마음을 두던 어머니 피비 사이에서 자란 이 아이는 이윽고 의사가 되었고, 스물다섯 살에 조선이라는 낯선 이름의 나라로 배를 탔다. 그가 그곳에서 60년 가까이 지고 갈 짐은 하나였다 — 몸을 앓는 여인들을 고치고, 배우지 못한 이들에게 배움을 주며, 이름 없는 이들에게 이름을 돌려주는 일.
말과 밭과 지하철도의 집
AI 일러스트셔우드 가문의 뿌리는 깊었다. 1634년 여름, 종교의 자유를 찾아 영국에서 아메리카로 건너온 청교도 토마스 셔우드가 로제타의 7대조였다고 전해진다. 메이플라워호의 청교도들이 매사추세츠에 닿은 지 불과 열네 해 뒤의 일이었다. 그 신앙의 혈통은 여러 세대를 지나 뉴욕 리버티의 농장으로 흘러들었다.
아버지 로즈벨트 렌슬러 셔우드는 스물한 살에 부모로부터 넓은 땅을 물려받아 마흔 무렵에는 거대한 농장을 일군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를 기억하게 하는 것은 땅의 크기가 아니라 삶의 결이었다. 훗날 그의 추모 기사에는 이런 문장이 실렸다고 한다. ‘자신의 말보다 나은 인간은 드물다. 그러나 나는 말보다 행동이 나은 사람을 적어도 한 사람 알고 있으니, 바로 내 아버지다.’
이 농장에는 ‘블랙 조’라 불리던 특별한 식구가 있었다. 조시아 윌슨이라는 본명의 흑인으로, 1850년 무렵 노예 농장을 탈출해 지하철도를 따라 캐나다로 가던 길에 셔우드의 농장에 눌러앉은 사람이었다. 어린 로제타는 그런 집에서, 믿음이란 곧 낮은 자리의 사람을 향한 행동임을 눈으로 배우며 자랐다.
어머니 피비, 그리고 엘리자 애그뉴의 그림자
어머니 피비 길더슬리브 셔우드는 열네 살 되던 해, 아버지와 같은 날 감리교로 개종했다고 전해진다. 스물아홉의 처녀가 두 번 아내를 잃은 쉰네 살 홀아비의 신부가 되어, 제 자식뿐 아니라 의붓자식과 손자들에게까지 자애로운 어머니가 된 사람이었다.
피비의 마음 깊은 곳에는 오래된 기억 하나가 있었다. 열 살 무렵, 실론(스리랑카)으로 떠나기 직전의 여성 선교사 엘리자 애그뉴를 만났던 일이다. ‘천 명의 딸들의 어머니’라 불렸다는 그 미혼의 선교사를 만난 후, 피비는 평생 선교를 향한 마음을 품고 살았다.
그 마음은 딸에게로 흘렀다. 로제타가 조선에 닿은 뒤, 한 달에 두 번 오는 우편 수령일은 그가 가장 기다리는 날이 되었다. 어머니의 편지는 때로 열두 장에 이를 만큼 길었고, 그 안에는 고향의 소소한 일상과 함께 늘 같은 기도가 담겨 있었다고 한다. ‘하나님,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시고, 살아서 다시 만날 날을 허락하소서.’
거울을 든 채 받은 수술
AI 일러스트로제타는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한 사람이었다.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에 들어가 3년 만에 학업을 마치겠다는 계획을 세웠고, 그 빠듯한 일정은 끝내 그의 건강을 갉아먹었다. 1887년 봄, 목에 이상이 생겼고 진단은 결핵성 내분비선 이상이었다.
즉각적인 수술이 필요하다는 말에, 로제타는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에테르나 클로로포름 같은 전신마취를 쓰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 여러 차례 척추 수술을 받으며, 마취에서 깨어날 때의 고통을 잊지 못했기 때문이라 전해진다. 결국 코카인 국소마취만으로 수술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는 의사에게 거울을 가져다 달라 청했다. 한 시간이 넘도록 몸을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자신의 목이 열리는 장면을 거울로 지켜보았다는 것이다. 가족도 친구도 목사까지도 그의 해외 선교를 만류했으나, 인도에서 온 의료 선교사 애나 존스 토번의 강연을 들은 뒤 로제타는 동양으로 가겠다는 결심을 끝내 굳혔다.
지는 해를 향하여
1890년 연말, 조선에 닿은 로제타는 리버티의 가족에게 긴 편지를 보냈다. 두루마리로 이어 붙인 그 편지는 길이가 31미터에 이르렀다고 전해지며, 제목은 ‘지는 해를 향하여’였다. 서쪽으로, 해가 지는 방향으로 나아간 여정과 한양에서의 나날이 그 안에 꼼꼼히 적혀 있었다.
그가 일하기 시작한 곳은 조선 최초의 여성 전용 병원 보구여관이었다. ‘보호하고 구하는 여성들의 집’이라는 뜻이었다. 남녀를 엄히 구분하던 조선의 풍습 때문에 여성들은 남성 의사에게 몸을 보이기를 꺼렸고, 그래서 여의사의 등장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문이 열리는 일이었다.
‘나를 위해 준비된 모든 것이 나에게는 꼭 맞다. 나는 여기서 분명 행복할 것이다.’ 도착 직후의 일기에 그는 그렇게 적었다. 그러나 곧 현실이 밀려왔다. 간호사도 약사도 없이 혼자 체온과 맥박을 재고, 약을 짓고, 주사를 놓고, 수술까지 감당해야 했다. 사흘 동안 쉰 명의 환자를 돌보느라 조선어 수업을 빼먹은 날의 기록이 남아 있다.
이름 없는 여인들
AI 일러스트조선에 와서 로제타가 가장 놀란 것은, 여인들에게 이름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작은애’나 ‘예쁜이’로 불리다가, 결혼해 아들을 낳고서야 비로소 그 아들의 이름을 따 ‘누구 엄마’로 불렸다. 1890년 10월의 일기에 그는 이 낯선 관습을 담담히 적어 두었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곧 주체적인 한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사람에게 이름은 정체성이자 개별성이었으므로, 로제타에게 여성 의료와 교육은 단지 병을 고치는 일이 아니라 이름을 돌려주는 일이기도 했다.
괴소문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양 의사가 아이들의 눈을 빼서 약으로 쓴다’,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말이 조선인들 사이에 돌았다. 그러나 진정성 있는 진료가 쌓이면서 오해는 서서히 풀렸고, 병을 고치는 손길을 통해 사람들은 낯선 이의 사랑과 섬김을 조금씩 경험하게 되었다.
박에스더, 열네 살의 조수
보구여관에서 로제타는 영어에 능한 다섯 소녀를 골라 기초 의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열네 살 소녀 김점동이 있었다. 그는 로제타의 조수 겸 통역으로 곁을 지키며, 낯선 서양 의술과 조선의 환자 사이를 잇는 다리가 되었다.
훗날 세례명을 따라 박에스더로 불린 이 소녀를, 로제타는 미국으로 데려가 의학 공부를 뒷받침했다. 그리하여 박에스더는 남녀를 통틀어 우리나라 최초의 양의(洋醫)이자 최초의 여의사가 되었다.
로제타는 이런 제자들을 정답게 ‘내 아이들’이라 불렀다. 진명여학교의 주역이 된 여메례, 여종 출신으로 수술을 받아 다시 걷게 된 뒤 우리나라 최초의 정식 간호사가 된 이그레이스(복업)까지 — 그가 길러 낸 이들은 하나같이 한국 근대 여성계의 1세대가 되었다.
하나님의 길 위에서 만난 사람
1889년 봄,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한 로제타는 뉴욕 스태튼 아일랜드의 소아 병원에서 인턴 과정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그는 훗날 남편이 될 윌리엄 제임스 홀을 만났다고 전해진다.
윌리엄 홀 역시 의료 선교사의 꿈을 품은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각자의 소명을 나란히 지고 조선으로 향했고, 서울을 넘어 더 북쪽의 평양으로 사역의 자리를 넓혀 갔다.
그러나 이 사랑에는 짧은 시간만이 허락되었다. 조선은 두 사람이 함께 꿈을 심은 땅이자, 곧 한 사람을 먼저 묻게 될 땅이기도 했다.
평양에 나타난 기이한 손님들
AI 일러스트1894년 5월 8일, 홀 부부는 평양에 도착했다. 일행에는 훗날 최초의 여의사가 될 김점동과 그의 남편 박유산, 홀 부부의 아기 셔우드와 보모까지 있었다. 서양 여자와 아기가 왔다는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졌다.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한양에서는 대낮에 길을 다니는 여인을 보기 어려웠으나, 평양은 그보다 훨씬 개방적이었다. 남녀가 뒤섞인 인파에 로제타는 뜰에 나가 꽃 한 송이 감상할 여유조차 얻지 못했다.
결국 윌리엄 홀이 나서서 사람들을 달랬다고 전해진다. ‘오늘은 돌아가십시오. 내일 오후에 열 명씩 짝을 지어 오시면, 방으로 들어와 아기와 제 아내를 가까이서 볼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낯선 손님과 낯선 도시가 서로를 처음 마주 보던 장면이었다.
한국의 바울, 김창식
평양 사역에는 조선인 동역자가 있었다. 김창식은 홀 부부의 평양 선교를 도운 첫 전도사였고, 훗날 우리나라 최초의 목사가 된 사람이다.
그는 심한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켰다. 로제타는 그런 그를 ‘한국의 바울’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낯선 나라에서 온 선교사와 그 땅의 사람이 함께 짊어진 사역이었다.
인연은 다음 세대로 이어졌다. 김창식의 아들 김영진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로제타의 아들 셔우드 홀과 함께 해주 구세병원에서 일했다. 두 집안의 신앙과 의술이 한 세대를 건너 다시 만난 셈이다.
잔인한 이별
1894년 가을, 평양에 머물던 선교사들이 잇달아 말라리아에 걸렸다. 그중 윌리엄 홀의 증세가 가장 무거웠다. 제물포에 이를 무렵 잠시 나아지는 듯했으나, 그는 배 안에서 다시 발진티푸스에 감염되고 말았다.
귀로는 험했다. 강화도 근처에서 배가 암초에 부딪치는 사고까지 겹쳤고, 평양에서 집까지 오는 데 아흐레가 걸렸다. 그사이 병세는 걷잡을 수 없이 깊어졌다. 11월 19일, 왕진 채비를 하던 로제타는 남편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아기를 안고 달려갔으나, 윌리엄 홀은 혼자 일어서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그해 로제타의 스물아홉 번째 생일이 있던 9월 19일, 그는 일기에 담담히 적었다. ‘이제 이십 대를 벗어나 삼십 대로 접어든다. 이상하게 느껴지지만 그게 인생이 아니겠는가.’ 그 문장을 쓴 지 두 달 만에, 그는 남편을 조선 땅에 묻었다. 로제타는 잠시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1896년 다시 조선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세상 누구보다 강한 어머니
1897년 가을, 로제타는 고향을 떠나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젊은 날의 꿈을 심고, 사랑하는 남편을 묻은 그 땅으로 아이들과 함께 돌아온 것이다.
슬픔은 그를 주저앉히지 못했다. 그는 남편의 죽음을 사명의 끝이 아니라 이어받음으로 받아들였다고 전해진다. 남편이 생전에 ‘조선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땅’이라 자주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로제타는 남편을 기려 평양에 기홀병원을 세웠고, 서울 동대문에는 볼드윈 진료소를, 평양에는 여성·아동을 위한 광혜여원을, 인천에는 부인병원을 세웠다. 슬픔을 벽돌 삼아 세운 병원들이었다.
봉래, 그리고 한국 특수교육의 시작
AI 일러스트로제타는 환자들 가운데서도 장애를 가진 이들을 특히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 장애인은 ‘천치’로 취급받았고, 시각장애인은 점쟁이나 무당이 되는 것이 그나마 나은 길로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동정이 아니라 교육이라고 그는 믿었다.
용기를 준 것은 봉래라는 한 소녀였다. 로제타에게 처음 한글 점자를 배운 시각장애 소녀였다. 처음에는 읽고 쓰기를 몹시 힘들어했으나, 점자의 구조를 터득한 뒤로는 읽기와 받아쓰기까지 익혀 갔다. 한 아이가 제 몫의 세계를 찾아가는 모습을 보며, 로제타는 특수교육의 길로 나아갈 용기를 얻었다고 전해진다.
마침내 1900년 1월, 그는 맹인 소녀 네 명과 함께 이디스 마거릿 병동의 방 한 칸에서 특수교육을 시작했다. 먼저 떠나보낸 딸의 이름을 붙인 그 병동에서, 조선의 시각장애 아이들이 처음으로 글을 만지기 시작했다.
통합의 교실, 앞선 교육자
로제타의 교육은 그 시대를 훌쩍 앞서 있었다. 그는 시각장애 학생을 따로 떼어 두지 않고, 일반 학생들과 한 교실에서 함께 배우게 했다. 오늘날의 통합교육을 백여 년 전 조선 땅에서 이미 실천한 셈이다.
이러한 신뢰는 열매를 맺었다. 그는 딸처럼 기른 시각장애 소녀 김성실을 교육한 뒤, 자신의 비서 겸 통역으로 함께 일했다고 전해진다. 배움을 받은 이가 곧 함께 일하는 동료가 되는, 낮은 자리에서 시작해 나란히 서는 방식이었다.
맹아·농아 교육에서 시작된 그의 열정은 이윽고 의학 교육으로 넓어졌다. 로제타는 조선여자의학강습소를 세웠는데, 이는 훗날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으로 이어지는 뿌리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여성이 배워 여성을 고치는 순환, 그가 평생 그려 온 그림이 그렇게 완성되어 갔다.
열린 믿음의 사람
로제타의 신앙에는 경계를 넘어서는 넉넉함이 있었다. 조선으로 오는 배 안에서 그는 조선인들의 종교를 이해하려 불교 서적을 읽었다고 전해진다. 낯선 땅의 사람을 먼저 알고자 하는 태도였다.
감리교도였으나 그는 열여섯 살 부활절에 감리교와 장로교, 가톨릭 미사까지 두루 참례했다고 한다. 교파의 담을 넘어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향하던 에큐메니컬 정신이 어린 시절부터 그의 안에 자라고 있었던 셈이다.
복음을 전해 받지 못했더라도 양심을 따라 진실하게 산 이들은 구원받는다고 믿는, 열린 믿음의 소유자였다. 그 넉넉함이 있었기에 그는 낯선 조선의 여인과 아이들을, 조선인 못지않게 사랑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양화진에 잠들다
1935년, 마흔여섯 해의 조선 사역을 마친 로제타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951년, 뉴저지 오션 그로브에서 여든여섯 해의 생을 마감했다. 남편을 잃고, 딸을 잃고, 그럼에도 조선을 떠나지 않았던 긴 세월의 끝이었다.
그의 유해는 그가 사랑한 땅, 서울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잠들었다. 먼저 간 남편 윌리엄 홀과 딸 이디스 마거릿의 곁이었다. 켄터키가 아니라 뉴욕의 시골 농장에서 시작된 한 생이, 마침내 한강가의 언덕에서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오늘날 그는 ‘한국 여의사의 어머니’이자 우리나라 여성 의학교육과 특수교육의 길을 처음 연 인물로 기억된다. 이름 없던 여인들에게 이름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에게 배움을, 앓는 이들에게 손길을 건넨 그 여정은 박에스더와 이그레이스, 그리고 아들 셔우드 홀을 지나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가상 인터뷰
※ 학생이 로제타 셔우드 홀의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창작 인터뷰입니다. 실제 발언 기록이 아닙니다.
- Q. 선교사님의 어린 시절과 조선에 오시기 전의 삶이 궁금합니다. 어떤 분이시며, 언제 어디에서 사역하셨나요?
- 저는 미국 뉴욕주 리버티에서 태어나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조선으로 파송되었습니다. 조선의 여성과 어린이들을 위한 의료·교육 사역에 힘썼고, 서울의 보구여관과 동대문 진료소, 그리고 평양의 기홀병원에서 일했습니다. 훗날에는 어린 시절 배운 점자를 바탕으로 시각장애 아이들을 위한 교육도 펼쳤습니다.
- Q. 스무 살 남짓에 조선으로 떠나신 그 믿음과 사명감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나요?
- 무엇보다 가정의 영향이 컸습니다. 아버지는 신실한 감리교인으로, 음주 절제와 노예제 반대 운동에 몸을 실으며 믿음을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사셨어요. 어머니는 늘 가족을 위해 기도하시고, 먼 선교지의 저에게 긴 편지를 보내 주셨지요. 특히 어머니가 어릴 적 선교사 엘리자 애그뉴를 만난 이야기를 들으며, 저 역시 의료 선교사의 꿈을 품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에게서는 행동하는 믿음을, 어머니에게서는 헌신과 사랑을 배운 셈입니다.
- Q. 편안한 미국을 떠나 수많은 나라 중에서도 조선을 택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 단지 새 나라에 대한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의과대학 시절 여러 의료 선교사의 강연을 들으며, 복음과 의술을 함께 전하는 삶에 깊이 감동했어요. 인도에서 일하던 애나 존스 토번의 이야기가 특히 제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당시 조선은 의료 혜택이 매우 부족했고, 여성들은 남성 의사에게 진료받기 어려운 환경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서 여성을 위한 의사로 저를 부르신다고 느꼈고, 누군가는 가야 했기에 그 부르심에 순종하고 싶었습니다.
- Q. 보구여관에 처음 도착했을 때 어떤 마음이 드셨고, 사역하며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 처음에는 무척 설레고 감사했습니다. 일기에도 ‘나를 위해 준비된 모든 것이 꼭 맞는다’고 적었지요. 하지만 현실은 훨씬 어려웠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언어와 인력 부족이었어요. 간호사도 약사도 충분치 않아, 체온과 맥박을 재고 약을 짓고 수술과 진료까지 대부분 직접 감당해야 했습니다. 사흘 동안 쉰 명 남짓을 돌보느라 조선어 수업을 빼먹은 적도 있었지요. 환자의 고통을 더 깊이 이해하고 싶은데 말을 자유롭게 나눌 수 없다는 사실이 가장 속상했습니다.
- Q. 그렇게 바쁜 중에도 한국어 공부를 병행하셨습니다. 어떻게 감당하셨나요?
- 정말 힘들었습니다. 한 달에 한국어 수업을 여섯 번밖에 듣지 못할 때도 있었으니까요. 그때마다 우선순위를 생각했습니다. 언어 습득이 먼저인지, 환자의 진료가 먼저인지 말이에요. 고린도전서 13장과 14장을 읽으며 답을 얻었습니다. 여러 언어를 말하는 것보다 사랑이 우선이라는 말씀이었지요. 그 사랑의 실천이란 결국 찾아오는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 주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 Q. 사랑하는 남편 윌리엄 홀 선교사님을 평양에서 잃으셨습니다. 그 큰 슬픔 속에서도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신 힘은 무엇이었나요?
- 한 영혼을 잃는다는 것은 정말 견디기 어려운 슬픔이었습니다. 1894년, 평양에서 남편이 말라리아와 발진티푸스로 세상을 떠났을 때, 저는 아직 어린 두 아이의 어머니였고 낯선 땅에 홀로 남겨진 사람이었지요. 잠시 미국으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님께서 제게 맡기신 사명이 더 분명해졌어요. 남편은 생전에 ‘조선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땅’이라 자주 말했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사명이 끝난 것이 아니라 제가 이어받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눈물 없는 날은 없었지만, 하나님과 아이들을 보며 다시 걸을 수 있었습니다.
- Q. 우리나라 최초로 특수교육을 시도하셨습니다. 특별히 그 일에 마음을 두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 1894년 평양에 첫발을 디딘 직후였습니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 장애를 가진 이들은 ‘천치’로 취급받았고, 시각장애인은 점쟁이나 무당이 되는 것이 그나마 낫다고 여겨졌지요. 그런 현실을 보며 저도 모르게 그들에게 더 마음이 쓰였습니다. 이들을 돕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육이 필요하다고 믿게 되었고, 그때부터 언젠가 스스로 특수교육을 펼치고 싶다는 열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 Q. 특수교육을 끝내 세우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합니다. 그 두려움을 어떻게 이겨내셨나요?
-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개념을 이해시킬 자신도 없었고, 자칫 오해를 살까 두려워 선뜻 엄두를 내기 어려웠지요. 그러나 봉래를 만난 뒤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봉래는 제게 처음 한글 점자를 배운 시각장애 소녀인데, 처음에는 무척 힘들어했지만 점자의 구조를 터득한 뒤로는 읽기를 배우고 곧 받아쓰기까지 해냈습니다. 그 아이가 자기 몫의 영역을 찾아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저도 더없이 행복했어요. 그렇게 1900년 1월, 맹인 소녀 네 명과 함께 이디스 마거릿 병동의 방 한 칸에서 특수교육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 Q. 박에스더를 비롯해 여러 조선 여성을 ‘내 아이들’이라 부르며 길러 내셨습니다. 그들에게 바란 것은 무엇이었나요?
- 제 사명은 조선의 여성들을 몸의 아픔에서 구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교육을 통해 하나님 안에서 주체성을 회복하고, 세상에 유용하게 쓰이는 존재로 세우고 싶었습니다. ‘여성을 위한 여성의 일’, 그것이 우리 선교회의 모토였지요. 열네 살 김점동은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가 되었고, 걷지 못하던 복업은 최초의 정식 간호사 이그레이스가 되었습니다. 이 아이들이 스스로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이 제게는 가장 큰 기쁨이었습니다.
- Q. 미국인이면서도 조선인 못지않게 조선을 사랑하셨습니다. 오늘의 청소년과 그리스도인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 저는 믿음이란 머무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이름 없이 잊힌 이들, 아파도 갈 곳 없는 이들, 배우고 싶어도 문이 닫힌 이들 — 그들의 곁으로 한 걸음 다가가는 것, 그것이 사랑의 시작이라 믿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이 크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거울을 든 채 제 수술을 지켜보던 그날처럼, 두려움 앞에서 눈을 감지 않는 용기 하나면 충분합니다. 낮은 자리의 한 사람을 진심으로 섬기는 일에서, 여러분의 소명은 시작될 것입니다.
자료 · 출처
- 학생 심화 연구 (드리미학교 전서연)
- 박정희, 『조선에 하나님의 빛을 들고 나타난 여성: 닥터 로제타 홀』
- 고려대학교의료원, 「시대를 밝힌 여인, 조선인 여의사 양성 씨앗 뿌리다」
- 월간조선, 「그녀의 덕을 보지 않은 한국인은 단 한 명도 없다」
-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 인물 기록
사실 골격은 학생 심층 연구를 통설·사료와 대조해 정정했습니다(입국 1895년, 목포 첫 예배 1898년, 광주 개척 1904년 등). 삽화는 회화체 AI 일러스트로 실제 사진과 구분해 표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