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건너뛰기

심화 연구 · 학생 탐구

이름 없는 이들에게 이름을 — 로제타 셔우드 홀

미국 뉴욕 리버티의 농장에서 자란 한 여의사가, 조선 여성과 아이들에게 몸의 치유와 배움의 길을 함께 놓았다. 그 여정은 남편의 무덤을 지나 평양의 맹인 소녀들에게로 이어졌다.

✍️ 드리미학교 ‘Missionaries from Aunae’ · 전서연 심층 연구

구한말 조선의 여성 전용 병원 앞뜰에 서 있는 서양 여의사의 뒷모습, 진료를 기다리는 여인들AI 일러스트
보구여관, 이름 없는 여인들이 처음으로 자기 몸을 맡길 수 있었던 집 · AI 생성 일러스트(회화체 재구성)
로제타 홀 초상

로제타 홀

Rosetta S. Hall

한국 여성 의학교육의 길을 연 ‘한국 여의사의 어머니’.

본명
Rosetta Sherwood Hall (한국명 홀·허을)
생몰
1865–1951
입국
1890년 (25세), 북감리회 여성해외선교회 파송
거점
서울 보구여관·동대문 볼드윈 진료소 / 평양 기홀병원·광혜여원
사역
여성의료, 맹아·농아 교육, 조선 여의사 양성
잠든 곳
서울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

👨‍👩‍👧 남편 윌리엄 제임스 홀(의료 선교사, 1894년 평양 사역 중 별세), 아들 셔우드 홀(훗날 조선의 결핵 퇴치에 헌신), 딸 이디스 마거릿(어려서 잃음 — 평양의 병동에 그 이름을 남겼다).

인물 상세 페이지 →

미국 뉴욕주의 시골 리버티에, 말을 기르고 넓은 밭을 가꾸던 농장이 있었다. 신실한 감리교도였던 아버지 로즈벨트 셔우드는 음주 절제와 노예제 반대 운동에 몸을 실었고, 그의 농장은 노예들이 자유를 찾아 캐나다로 가던 지하철도(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가 잠시 쉬어 가는 역이기도 했다. 그 집에서 1865년 가을에 한 딸이 태어났다. 로제타 셔우드였다.

행동으로 믿음을 증명한 아버지와, 먼 선교지의 소식에 마음을 두던 어머니 피비 사이에서 자란 이 아이는 이윽고 의사가 되었고, 스물다섯 살에 조선이라는 낯선 이름의 나라로 배를 탔다. 그가 그곳에서 60년 가까이 지고 갈 짐은 하나였다 — 몸을 앓는 여인들을 고치고, 배우지 못한 이들에게 배움을 주며, 이름 없는 이들에게 이름을 돌려주는 일.

말과 밭과 지하철도의 집

19세기 미국 뉴욕 시골의 넓은 농장과 말들, 멀리 작게 서 있는 소녀의 뒷모습AI 일러스트
리버티의 농장 — 말과 밭, 그리고 자유를 찾아온 이들이 머물던 집 · AI 생성 일러스트(회화체 재구성)

셔우드 가문의 뿌리는 깊었다. 1634년 여름, 종교의 자유를 찾아 영국에서 아메리카로 건너온 청교도 토마스 셔우드가 로제타의 7대조였다고 전해진다. 메이플라워호의 청교도들이 매사추세츠에 닿은 지 불과 열네 해 뒤의 일이었다. 그 신앙의 혈통은 여러 세대를 지나 뉴욕 리버티의 농장으로 흘러들었다.

아버지 로즈벨트 렌슬러 셔우드는 스물한 살에 부모로부터 넓은 땅을 물려받아 마흔 무렵에는 거대한 농장을 일군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를 기억하게 하는 것은 땅의 크기가 아니라 삶의 결이었다. 훗날 그의 추모 기사에는 이런 문장이 실렸다고 한다. ‘자신의 말보다 나은 인간은 드물다. 그러나 나는 말보다 행동이 나은 사람을 적어도 한 사람 알고 있으니, 바로 내 아버지다.’

이 농장에는 ‘블랙 조’라 불리던 특별한 식구가 있었다. 조시아 윌슨이라는 본명의 흑인으로, 1850년 무렵 노예 농장을 탈출해 지하철도를 따라 캐나다로 가던 길에 셔우드의 농장에 눌러앉은 사람이었다. 어린 로제타는 그런 집에서, 믿음이란 곧 낮은 자리의 사람을 향한 행동임을 눈으로 배우며 자랐다.

어머니 피비, 그리고 엘리자 애그뉴의 그림자

어머니 피비 길더슬리브 셔우드는 열네 살 되던 해, 아버지와 같은 날 감리교로 개종했다고 전해진다. 스물아홉의 처녀가 두 번 아내를 잃은 쉰네 살 홀아비의 신부가 되어, 제 자식뿐 아니라 의붓자식과 손자들에게까지 자애로운 어머니가 된 사람이었다.

피비의 마음 깊은 곳에는 오래된 기억 하나가 있었다. 열 살 무렵, 실론(스리랑카)으로 떠나기 직전의 여성 선교사 엘리자 애그뉴를 만났던 일이다. ‘천 명의 딸들의 어머니’라 불렸다는 그 미혼의 선교사를 만난 후, 피비는 평생 선교를 향한 마음을 품고 살았다.

그 마음은 딸에게로 흘렀다. 로제타가 조선에 닿은 뒤, 한 달에 두 번 오는 우편 수령일은 그가 가장 기다리는 날이 되었다. 어머니의 편지는 때로 열두 장에 이를 만큼 길었고, 그 안에는 고향의 소소한 일상과 함께 늘 같은 기도가 담겨 있었다고 한다. ‘하나님,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시고, 살아서 다시 만날 날을 허락하소서.’

거울을 든 채 받은 수술

19세기 말 미국 병원의 수술실, 거울을 든 채 수술대에 앉은 여성의 실루엣AI 일러스트
거울을 든 채 자신의 수술을 지켜본 의학도 — 의지의 초상 · AI 생성 일러스트(회화체 재구성)

로제타는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한 사람이었다.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에 들어가 3년 만에 학업을 마치겠다는 계획을 세웠고, 그 빠듯한 일정은 끝내 그의 건강을 갉아먹었다. 1887년 봄, 목에 이상이 생겼고 진단은 결핵성 내분비선 이상이었다.

즉각적인 수술이 필요하다는 말에, 로제타는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에테르나 클로로포름 같은 전신마취를 쓰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 여러 차례 척추 수술을 받으며, 마취에서 깨어날 때의 고통을 잊지 못했기 때문이라 전해진다. 결국 코카인 국소마취만으로 수술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는 의사에게 거울을 가져다 달라 청했다. 한 시간이 넘도록 몸을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자신의 목이 열리는 장면을 거울로 지켜보았다는 것이다. 가족도 친구도 목사까지도 그의 해외 선교를 만류했으나, 인도에서 온 의료 선교사 애나 존스 토번의 강연을 들은 뒤 로제타는 동양으로 가겠다는 결심을 끝내 굳혔다.

지는 해를 향하여

1890년 연말, 조선에 닿은 로제타는 리버티의 가족에게 긴 편지를 보냈다. 두루마리로 이어 붙인 그 편지는 길이가 31미터에 이르렀다고 전해지며, 제목은 ‘지는 해를 향하여’였다. 서쪽으로, 해가 지는 방향으로 나아간 여정과 한양에서의 나날이 그 안에 꼼꼼히 적혀 있었다.

그가 일하기 시작한 곳은 조선 최초의 여성 전용 병원 보구여관이었다. ‘보호하고 구하는 여성들의 집’이라는 뜻이었다. 남녀를 엄히 구분하던 조선의 풍습 때문에 여성들은 남성 의사에게 몸을 보이기를 꺼렸고, 그래서 여의사의 등장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문이 열리는 일이었다.

‘나를 위해 준비된 모든 것이 나에게는 꼭 맞다. 나는 여기서 분명 행복할 것이다.’ 도착 직후의 일기에 그는 그렇게 적었다. 그러나 곧 현실이 밀려왔다. 간호사도 약사도 없이 혼자 체온과 맥박을 재고, 약을 짓고, 주사를 놓고, 수술까지 감당해야 했다. 사흘 동안 쉰 명의 환자를 돌보느라 조선어 수업을 빼먹은 날의 기록이 남아 있다.

이름 없는 여인들

구한말 조선 병원의 진찰실에서 여성 환자를 돌보는 여의사, 인물은 작게 뒤에서AI 일러스트
간호사도 약사도 없이 혼자 감당한 진료 — 보구여관의 하루 · AI 생성 일러스트(회화체 재구성)

조선에 와서 로제타가 가장 놀란 것은, 여인들에게 이름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작은애’나 ‘예쁜이’로 불리다가, 결혼해 아들을 낳고서야 비로소 그 아들의 이름을 따 ‘누구 엄마’로 불렸다. 1890년 10월의 일기에 그는 이 낯선 관습을 담담히 적어 두었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곧 주체적인 한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사람에게 이름은 정체성이자 개별성이었으므로, 로제타에게 여성 의료와 교육은 단지 병을 고치는 일이 아니라 이름을 돌려주는 일이기도 했다.

괴소문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양 의사가 아이들의 눈을 빼서 약으로 쓴다’,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말이 조선인들 사이에 돌았다. 그러나 진정성 있는 진료가 쌓이면서 오해는 서서히 풀렸고, 병을 고치는 손길을 통해 사람들은 낯선 이의 사랑과 섬김을 조금씩 경험하게 되었다.

박에스더, 열네 살의 조수

보구여관에서 로제타는 영어에 능한 다섯 소녀를 골라 기초 의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열네 살 소녀 김점동이 있었다. 그는 로제타의 조수 겸 통역으로 곁을 지키며, 낯선 서양 의술과 조선의 환자 사이를 잇는 다리가 되었다.

훗날 세례명을 따라 박에스더로 불린 이 소녀를, 로제타는 미국으로 데려가 의학 공부를 뒷받침했다. 그리하여 박에스더는 남녀를 통틀어 우리나라 최초의 양의(洋醫)이자 최초의 여의사가 되었다.

로제타는 이런 제자들을 정답게 ‘내 아이들’이라 불렀다. 진명여학교의 주역이 된 여메례, 여종 출신으로 수술을 받아 다시 걷게 된 뒤 우리나라 최초의 정식 간호사가 된 이그레이스(복업)까지 — 그가 길러 낸 이들은 하나같이 한국 근대 여성계의 1세대가 되었다.

하나님의 길 위에서 만난 사람

1889년 봄,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한 로제타는 뉴욕 스태튼 아일랜드의 소아 병원에서 인턴 과정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그는 훗날 남편이 될 윌리엄 제임스 홀을 만났다고 전해진다.

윌리엄 홀 역시 의료 선교사의 꿈을 품은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각자의 소명을 나란히 지고 조선으로 향했고, 서울을 넘어 더 북쪽의 평양으로 사역의 자리를 넓혀 갔다.

그러나 이 사랑에는 짧은 시간만이 허락되었다. 조선은 두 사람이 함께 꿈을 심은 땅이자, 곧 한 사람을 먼저 묻게 될 땅이기도 했다.

평양에 나타난 기이한 손님들

구한말 평양의 골목에 몰려든 조선 사람들과 서양인 가족의 집, 인물은 작게AI 일러스트
1894년 평양 — 서양 여자와 아기를 보러 몰려든 사람들 · AI 생성 일러스트(회화체 재구성)

1894년 5월 8일, 홀 부부는 평양에 도착했다. 일행에는 훗날 최초의 여의사가 될 김점동과 그의 남편 박유산, 홀 부부의 아기 셔우드와 보모까지 있었다. 서양 여자와 아기가 왔다는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졌다.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한양에서는 대낮에 길을 다니는 여인을 보기 어려웠으나, 평양은 그보다 훨씬 개방적이었다. 남녀가 뒤섞인 인파에 로제타는 뜰에 나가 꽃 한 송이 감상할 여유조차 얻지 못했다.

결국 윌리엄 홀이 나서서 사람들을 달랬다고 전해진다. ‘오늘은 돌아가십시오. 내일 오후에 열 명씩 짝을 지어 오시면, 방으로 들어와 아기와 제 아내를 가까이서 볼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낯선 손님과 낯선 도시가 서로를 처음 마주 보던 장면이었다.

한국의 바울, 김창식

평양 사역에는 조선인 동역자가 있었다. 김창식은 홀 부부의 평양 선교를 도운 첫 전도사였고, 훗날 우리나라 최초의 목사가 된 사람이다.

그는 심한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켰다. 로제타는 그런 그를 ‘한국의 바울’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낯선 나라에서 온 선교사와 그 땅의 사람이 함께 짊어진 사역이었다.

인연은 다음 세대로 이어졌다. 김창식의 아들 김영진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로제타의 아들 셔우드 홀과 함께 해주 구세병원에서 일했다. 두 집안의 신앙과 의술이 한 세대를 건너 다시 만난 셈이다.

잔인한 이별

1894년 가을, 평양에 머물던 선교사들이 잇달아 말라리아에 걸렸다. 그중 윌리엄 홀의 증세가 가장 무거웠다. 제물포에 이를 무렵 잠시 나아지는 듯했으나, 그는 배 안에서 다시 발진티푸스에 감염되고 말았다.

귀로는 험했다. 강화도 근처에서 배가 암초에 부딪치는 사고까지 겹쳤고, 평양에서 집까지 오는 데 아흐레가 걸렸다. 그사이 병세는 걷잡을 수 없이 깊어졌다. 11월 19일, 왕진 채비를 하던 로제타는 남편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아기를 안고 달려갔으나, 윌리엄 홀은 혼자 일어서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그해 로제타의 스물아홉 번째 생일이 있던 9월 19일, 그는 일기에 담담히 적었다. ‘이제 이십 대를 벗어나 삼십 대로 접어든다. 이상하게 느껴지지만 그게 인생이 아니겠는가.’ 그 문장을 쓴 지 두 달 만에, 그는 남편을 조선 땅에 묻었다. 로제타는 잠시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1896년 다시 조선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세상 누구보다 강한 어머니

1897년 가을, 로제타는 고향을 떠나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젊은 날의 꿈을 심고, 사랑하는 남편을 묻은 그 땅으로 아이들과 함께 돌아온 것이다.

슬픔은 그를 주저앉히지 못했다. 그는 남편의 죽음을 사명의 끝이 아니라 이어받음으로 받아들였다고 전해진다. 남편이 생전에 ‘조선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땅’이라 자주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로제타는 남편을 기려 평양에 기홀병원을 세웠고, 서울 동대문에는 볼드윈 진료소를, 평양에는 여성·아동을 위한 광혜여원을, 인천에는 부인병원을 세웠다. 슬픔을 벽돌 삼아 세운 병원들이었다.

봉래, 그리고 한국 특수교육의 시작

구한말 평양 병동의 작은 방에서 점자를 손끝으로 읽는 조선 소녀들, 인물은 작게 뒤에서AI 일러스트
1900년 이디스 마거릿 병동 — 조선 최초의 맹아 교육이 시작된 방 · AI 생성 일러스트(회화체 재구성)

로제타는 환자들 가운데서도 장애를 가진 이들을 특히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 장애인은 ‘천치’로 취급받았고, 시각장애인은 점쟁이나 무당이 되는 것이 그나마 나은 길로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동정이 아니라 교육이라고 그는 믿었다.

용기를 준 것은 봉래라는 한 소녀였다. 로제타에게 처음 한글 점자를 배운 시각장애 소녀였다. 처음에는 읽고 쓰기를 몹시 힘들어했으나, 점자의 구조를 터득한 뒤로는 읽기와 받아쓰기까지 익혀 갔다. 한 아이가 제 몫의 세계를 찾아가는 모습을 보며, 로제타는 특수교육의 길로 나아갈 용기를 얻었다고 전해진다.

마침내 1900년 1월, 그는 맹인 소녀 네 명과 함께 이디스 마거릿 병동의 방 한 칸에서 특수교육을 시작했다. 먼저 떠나보낸 딸의 이름을 붙인 그 병동에서, 조선의 시각장애 아이들이 처음으로 글을 만지기 시작했다.

통합의 교실, 앞선 교육자

로제타의 교육은 그 시대를 훌쩍 앞서 있었다. 그는 시각장애 학생을 따로 떼어 두지 않고, 일반 학생들과 한 교실에서 함께 배우게 했다. 오늘날의 통합교육을 백여 년 전 조선 땅에서 이미 실천한 셈이다.

이러한 신뢰는 열매를 맺었다. 그는 딸처럼 기른 시각장애 소녀 김성실을 교육한 뒤, 자신의 비서 겸 통역으로 함께 일했다고 전해진다. 배움을 받은 이가 곧 함께 일하는 동료가 되는, 낮은 자리에서 시작해 나란히 서는 방식이었다.

맹아·농아 교육에서 시작된 그의 열정은 이윽고 의학 교육으로 넓어졌다. 로제타는 조선여자의학강습소를 세웠는데, 이는 훗날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으로 이어지는 뿌리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여성이 배워 여성을 고치는 순환, 그가 평생 그려 온 그림이 그렇게 완성되어 갔다.

열린 믿음의 사람

로제타의 신앙에는 경계를 넘어서는 넉넉함이 있었다. 조선으로 오는 배 안에서 그는 조선인들의 종교를 이해하려 불교 서적을 읽었다고 전해진다. 낯선 땅의 사람을 먼저 알고자 하는 태도였다.

감리교도였으나 그는 열여섯 살 부활절에 감리교와 장로교, 가톨릭 미사까지 두루 참례했다고 한다. 교파의 담을 넘어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향하던 에큐메니컬 정신이 어린 시절부터 그의 안에 자라고 있었던 셈이다.

복음을 전해 받지 못했더라도 양심을 따라 진실하게 산 이들은 구원받는다고 믿는, 열린 믿음의 소유자였다. 그 넉넉함이 있었기에 그는 낯선 조선의 여인과 아이들을, 조선인 못지않게 사랑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양화진에 잠들다

1935년, 마흔여섯 해의 조선 사역을 마친 로제타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951년, 뉴저지 오션 그로브에서 여든여섯 해의 생을 마감했다. 남편을 잃고, 딸을 잃고, 그럼에도 조선을 떠나지 않았던 긴 세월의 끝이었다.

그의 유해는 그가 사랑한 땅, 서울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잠들었다. 먼저 간 남편 윌리엄 홀과 딸 이디스 마거릿의 곁이었다. 켄터키가 아니라 뉴욕의 시골 농장에서 시작된 한 생이, 마침내 한강가의 언덕에서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오늘날 그는 ‘한국 여의사의 어머니’이자 우리나라 여성 의학교육과 특수교육의 길을 처음 연 인물로 기억된다. 이름 없던 여인들에게 이름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에게 배움을, 앓는 이들에게 손길을 건넨 그 여정은 박에스더와 이그레이스, 그리고 아들 셔우드 홀을 지나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가상 인터뷰AI로 재현한 인터뷰 영상과 문답을 ‘가상 인터뷰’에서 만나보세요.보러가기 →

자료 · 출처

  • 학생 심화 연구 (드리미학교 전서연)
  • 박정희, 『조선에 하나님의 빛을 들고 나타난 여성: 닥터 로제타 홀』
  • 고려대학교의료원, 「시대를 밝힌 여인, 조선인 여의사 양성 씨앗 뿌리다」
  • 월간조선, 「그녀의 덕을 보지 않은 한국인은 단 한 명도 없다」
  •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 인물 기록

사실 골격은 학생 심층 연구를 통설·사료와 대조해 정정했습니다(입국 1895년, 목포 첫 예배 1898년, 광주 개척 1904년 등). 삽화는 회화체 AI 일러스트로 실제 사진과 구분해 표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