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건너뛰기

심화 연구 · 학생 탐구

부활주일에 닿은 배 — 헨리 아펜젤러와 정동의 첫 아침

펜실베이니아의 농장에서 자란 청년이 무디의 부흥회에서 조선을 마음에 품었다. 배재의 문을 열고 정동에 첫 예배당을 세운 그는, 성경을 함께 옮기러 가던 뱃길에서 세상을 떠났다.

✍️ 드리미학교 ‘Missionaries from Aunae’ · 정선호 심층 연구

1885년 부활절, 제물포 앞바다에 닿는 증기선을 먼 언덕에서 바라보는 장면AI 일러스트
1885년 부활주일, 제물포에 닿은 배. 조선의 문 앞에서 젊은 선교사의 사역이 시작되었다. · AI 생성 일러스트(회화체 재구성)
헨리 아펜젤러 초상

헨리 아펜젤러

Henry G. Appenzeller

배재학당과 정동제일교회를 연 북감리회 개척 선교사, 성경을 옮기러 가던 뱃길에서 순직하다.

본명
Henry Gerhard Appenzeller (한국명 아편설라)
생몰
1858–1902
입국
1885년 — 부활주일(4월 5일) 제물포 도착, 6월 재입국
거점
서울 정동
사역
배재학당 설립 · 정동제일교회(벧엘예배당) 창립 · 성경 번역 · 출판
잠든 곳
서울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유해 미수습, 기념)

👨‍👩‍👧 부인 엘라, 그리고 조선에서 태어난 서양인 아이 가운데 하나로 전해지는 딸 앨리스 아펜젤러가 있었다. 앨리스는 훗날 이화학당의 교장이 되어 아버지가 밟은 땅에서 다음 세대의 교육을 이어 갔다.

인물 상세 페이지 →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농촌, 독일계 이민의 후손으로 태어난 청년이 있었다. 그는 대학과 신학교를 거치는 동안 세계 곳곳으로 흩어지려는 젊은이들의 열기 한가운데 서 있었다. 드와이트 무디가 이끄는 부흥의 물결과 학생자원운동(SVM)은 그에게 조선이라는, 아직 아무도 이름을 제대로 부르지 못하던 나라를 향한 마음을 심었다.

1885년 부활주일, 그는 언더우드와 함께 제물포 앞바다에 닿았다. 스물일곱의 나이였다. 서양 사람이 서울에 나타나는 것이 아직 위험하다는 전갈에 한 차례 일본으로 물러났다가, 그해 여름 다시 돌아와 정동에 자리를 잡았다. 그 정동의 언덕에서 학교가 열리고 예배당이 세워지고, 조선인이 조선인으로 일어서기를 바라던 한 사람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농장의 아들, 부흥회에서 조선을 품다

19세기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농장 풍경, 멀리 흰 목조 교회가 보이는 들판AI 일러스트
펜실베이니아의 농장에서 자란 청년은 무디의 부흥회에서 조선을 마음에 품었다. · AI 생성 일러스트(회화체 재구성)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시골, 독일계 이민의 후손으로 자란 아이가 있었다. 그는 성실한 신앙의 가풍 속에서 자랐고, 대학과 신학교를 거치며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사는 법을 먼저 배웠다. 훗날 그의 삶을 지켜본 이들은, 미지의 나라로 떠나기 위한 가장 좋은 준비란 결국 지금 있는 자리를 성실히 사는 일이었다고 적었다.

그가 조선을 마음에 품게 된 자리는 드와이트 무디의 부흥운동과, 거기서 태어난 학생자원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물결에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비롯한 초기 선교사들의 한국행이 잇따라 결단되었다. 두 사람 모두 무디의 리바이벌에서 선교사가 되기로 마음을 정했다고 전해진다.

감리회의 아펜젤러가 조선으로 가게 된 사정에는 한 가지 이야기가 덧붙는다. 원래 가기로 했던 친구를 대신해 그가 조선행을 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연처럼 보이는 이 자리바꿈을, 학생 연구자는 사람의 순종을 통로로 삼아 일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읽었다.

부활주일, 제물포에 닿다

1880년대 제물포 항구에 도착한 증기선과 부두, 멀리서 바라본 풍경AI 일러스트
부활주일에 닿았으나 곧 물러나야 했던 첫 상륙. 문은 서서히 열렸다. · AI 생성 일러스트(회화체 재구성)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아펜젤러 부부와 언더우드를 태운 배가 제물포에 닿았다. 그러나 조선은 아직 문이 다 열린 나라가 아니었다. 세 달 전 갑신정변의 여파로 서양인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았고, 서양 여인이 서울에 나타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미국 공사의 전갈이 왔다. 부부는 일주일 만에 일본으로 물러났다고 전해진다.

먼저 서울에 발을 들인 것은 의료 선교사 윌리엄 스크랜튼이었다. 그가 정동에 부지와 집들을 마련해 선교 기지를 연 뒤에야, 아펜젤러 일행은 그해 6월 다시 인천을 거쳐 서울로 들어와 정동에 짐을 풀 수 있었다.

처음 조선의 일상은 낯설고 조심스러웠다. 제대로 된 언어 교사를 구하기 어려웠고, 부인들과 아이들은 서양 사람이 다가가기만 해도 소리를 지르며 달아나곤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초기 선교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했다.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일과, 언어를 배우는 일이었다.

정동, 외교관의 언덕에 선 선교사들

정동은 서양의 공관들이 하나둘 들어서던 언덕이었다. 미국 공사관과 가까운 이곳에 감리회 선교부가 자리를 잡았고, 스크랜튼과 아펜젤러의 집이 이웃해 섰다. 성벽에 막힌 서쪽을 제외하고 동·남·북 세 방향으로 터를 넓혀 가며 학교와 병원과 예배당이 차례로 들어섰다.

정동이 종교의 자리인 동시에 훗날 독립운동의 거점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이 지리도 한몫했다. 예배당과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이 서로 가까워 소식이 오가기 쉬웠고, 일본의 눈에 띄더라도 미국 공사관으로 피할 수 있는 위치였다. 뒷날 3·1운동 무렵, 오르간 뒤 송풍구에 숨어 독립신문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이 언덕에서 전해진다.

동양 문화를 아끼던 한 서양인 여행자는 1890년대 서울을 두고, 외국인들이 지은 조악한 건물들 탓에 한국적 아름다움을 잃어 가는 은둔국의 수도라고 아쉬워했다고 한다. 정동은 그렇게 옛것과 새것이 부딪치던 경계의 자리였다.

방 두 칸에서 시작한 배재학당

1880년대 서울 정동의 한옥 교실에서 몇몇 조선 청년이 책을 펴고 앉아 있는 뒷모습AI 일러스트
방 두 칸의 벽을 헐어 만든 교실. 배재학당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AI 생성 일러스트(회화체 재구성)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으로 꼽힌다. 그러나 그 시작은 미약했다. 동료 선교사 윌리엄 스크랜튼의 집 한 채를 사서 방 두 칸의 벽을 헐어 만든 작은 교실이 전부였다. 이겸라와 고영필, 두 사람에게 영어를 가르치던 것이 배재의 첫 수업이었다고 전해진다.

처음 학생들은 배움 자체보다 출세를 위해 영어를 익히러 온 경우가 많았다. 첫 두 학생도 시병원에서 서양 의술을 배우려면 먼저 영어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찾아왔다. 아펜젤러는 그런 학생들에게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라는 교훈을 내걸며 도전을 주었다.

1887년 봄, 왕실은 이 남자학교에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교명을 내렸다. 스크랜튼의 여학교에 ‘이화학당’, 그의 병원에 ‘시병원’이라는 이름이 내려진 것과 함께였다. 이로써 선교사들의 교육과 의료 사업은 국왕과 정부의 공인을 받는 자리에 올라섰다.

‘자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을 내보내려는 것

아펜젤러가 남긴 말 가운데 그의 교육관을 가장 잘 보여 주는 문장이 있다. “우리는 통역관을 양성하거나 학교의 일꾼을 양성하려는 것이 아니요, 자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을 내보내려는 것이다.” 출세를 좇던 학생들의 시선을 그는 다른 곳으로 돌리려 했다.

그가 바란 것은 조선인을 미국인으로 바꾸는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조선인이 조선인으로 세워져 조선 사회를 스스로 일으켜 세우도록 하는 일이었다. 이 점은 이웃한 이화학당의 정신과도 맞닿아 있었다. 왜곡된 관점을 바로잡고, 복음과 자유의 정신을 지닌 자주적인 사람을 기르는 것이 목표였다.

그 씨앗은 열매를 맺었다. 배재학당에서는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 한글학자 주시경, 시인 김소월 같은 이들이 나와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운동에 힘을 보탰다고 전해진다. 아펜젤러가 뿌린 자유의 씨앗이 한국 사회에 깊이 뿌리내렸다고, 학생 연구자는 적었다.

벧엘예배당, 정동제일교회의 첫 자리

1880년대 서울 남대문 안 한옥 예배당 앞에 사람들이 모여드는 이른 아침 풍경AI 일러스트
남대문 안 한옥에서 시작된 집회. 이 자리가 정동제일교회로 이어졌다. · AI 생성 일러스트(회화체 재구성)

배재의 현판을 받은 뒤 아펜젤러는 학생 전도에 더욱 힘을 기울였다. 그해 배재학당 학생 박중상과 한용경이 세례를 받았고, 만주에서 세례를 받고 들어온 매서인 최성균과 함께 남대문 안의 한옥 ‘벧엘예배당’에서 한국인 집회가 시작되었다.

이 벧엘예배당이 뒷날의 정동제일교회로 이어진다. 처음에는 아펜젤러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고, 성도가 늘자 한옥 두 채를 사서 예배당을 마련했다고 전해진다. 그 예배당에는 개인을 신앙인으로 세우려던 아펜젤러의 뜻이 스며 있었다.

1897년 12월, 정동에는 남자와 여자가 한 지붕 아래에서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벽돌 예배당이 마련되었다. 비록 그 사이에 휘장이 놓였을지라도, 한 공간에 남녀가 함께한다는 것 자체가 그 시대에는 놀라운 혁신이었다.

안방으로 통하는 길 — 첫 여성 세례

벧엘예배당의 집회가 시작된 다음 주일, 최성균의 아내 ‘최씨 부인’이 아펜젤러에게 세례를 받았다. 한국 최초의 개신교 여성 세례인으로 전해지는 이다. 아펜젤러는 이 일을 두고 ‘안방으로 통하는 길을 연 사건(Inroads into the An Pang)’이라고 표현했다.

여성이 좀처럼 바깥세상과 마주하지 못하던 시대였다. 그 안방의 문이 한 사람의 세례로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최씨 부인의 세례에서 용기를 얻은 여성 구도자 다섯 명이 이듬해 정월, 한꺼번에 세례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곧이어 이화학당 학생들과 벧엘예배당의 여성 교인들, 여선교사들이 모여 한국 최초의 주일학교 모임이 시작되었다. 아펜젤러의 학생 전도가, 여성들이 스스로 신앙과 배움을 청하는 흐름으로 번져 간 것이다.

함께 옮긴 성경, 함께 세운 인쇄소

선교사들이 조선에 남긴 뜻밖의 흔적 가운데 하나는 글이었다. 초기 선교사들이 우리말 표기에 띄어쓰기를 도입한 이들로 이야기되며, 아펜젤러 역시 성경 번역과 출판 사역에 깊이 관여했다.

번역은 단순히 언어를 옮기는 일이 아니었다. 조선의 문화와 정서에 맞는 성경을 만드는 일이었고, 그래서 때로 서로 다투기도 하며 함께 연구하는 과정이었다고 전해진다. 아펜젤러는 이 공동의 작업에 성실히 참여했다.

그가 세운 배재학당에는 활판 인쇄소가 놓였다. 학생들이 지식을 받는 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되도록 훈련하려는 뜻이었다. 배움과 인쇄와 번역이, 정동의 언덕에서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감리교와 장로교, 함께 걷다

아펜젤러의 조선행에는 늘 한 사람의 이름이 따라붙는다. 같은 부활주일에 조선에 닿은 장로교의 언더우드다. 감리교의 아펜젤러는 정동제일교회를, 장로교의 언더우드는 새문안교회를 세운 것으로 이야기된다.

교파가 달랐으나 두 사람은 초기의 좁은 땅에서 함께 일했다. 감리교와 장로교가 손을 잡고 선교하는 에큐메니컬의 협력이었고, 뒷날에 이르러서야 서로 구역을 나누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화학당의 교명을 정할 때에도 아펜젤러가 만찬 자리에서 ‘학교 이름’ 문제를 거론하며 협력을 부탁했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자기 학교만이 아니라 이웃 선교의 자리까지 함께 살피던 사람이었다.

조선인을 조선인으로 세우다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의 원칙 가운데 학생 연구자가 가장 인상 깊게 꼽은 것은, 조선인을 미국인으로 만들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펜젤러의 선교와 메리 스크랜튼의 선교가 공유한 특징이기도 했다.

그들은 조선을 단숨에 부강한 나라로 일으켜 세우지는 못했다. 실제로 이 나라의 제도를 근대화한 힘은 다른 데서도 컸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사역은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세우는 일이었다. 그렇게 길러진 조선인 지식인들이 자주적으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아펜젤러가 심은 것은 눈에 보이는 건물보다, 사람의 정신에 뿌린 자유와 주체의 씨앗이었다. 그 씨앗은 개인이 스스로 생각하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사회로 자라났다.

성경을 옮기러 가던 뱃길에서

1900년대 조선 남해안, 이른 안개 속으로 나아가는 작은 증기선을 먼 바다에서 바라본 장면AI 일러스트
성경을 함께 옮기러 가던 뱃길. 그는 돌아오지 못했다. · AI 생성 일러스트(회화체 재구성)

1902년, 아펜젤러는 성경 번역을 위한 회의에 참석하려고 배를 타고 남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 뱃길에서 사고가 났고, 그는 물에 빠져 세상을 떠났다. 마흔넷의 나이였다.

그가 마지막 순간 함께 있던 이를 구하려다 목숨을 잃었다고도 전해진다. 확실히 남은 것은, 그가 조선의 사람들에게 성경을 우리말로 건네주려는 일을 하러 가던 길 위에서 죽었다는 사실이다.

유해는 끝내 수습되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그를 기리는 자리가 마련되어, 그가 사랑한 땅의 사람들 곁에 그 이름이 남았다.

정동에 남은 이름

그가 떠난 뒤에도 정동의 언덕은 그가 세운 것들로 이어졌다. 배재학당은 배재중·고·대로, 정동제일교회는 오늘까지 그 자리에 남은 문화재 예배당으로 자라났다. 조선에서 태어난 딸 앨리스는 훗날 이화학당의 교장이 되어, 아버지가 밟은 땅에서 다음 세대의 교육을 이어 갔다고 전해진다.

학생 연구자는 배재학당을 오늘의 교육에 비추어 물었다. 그 시절의 학교가 세상을 바꿀 엘리트들을 길러 냈다면, 지금의 우리는 무엇을 기르고 있는가. 일제강점기와 전쟁의 긴 세월을 지나, 이제야 다시 교육을 고민할 여유를 얻은 이 땅에서 제2의 배재학당을 꿈꿀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아펜젤러의 이야기는 결국 한 사람의 순종이 어디까지 흘러갈 수 있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친구 대신 떠난 청년, 방 두 칸에서 시작한 학교, 안방의 문을 연 세례, 그리고 성경을 옮기러 가던 마지막 뱃길. 그 흐름의 끝에 오늘의 우리가 서 있다.

가상 인터뷰

학생이 헨리 아펜젤러의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창작 인터뷰입니다. 실제 발언 기록이 아닙니다.

Q. 안녕하세요. 인터뷰에 앞서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헨리 아펜젤러라고 합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시골에서 자랐고, 감리회의 선교사로 조선에 왔습니다. 1885년 부활주일에 제물포에 닿았고, 서울 정동에서 배재학당을 열고 정동의 첫 예배당을 세우는 일에 삶을 두었습니다.
Q. 조선으로 오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무디 선생의 부흥운동과 거기서 태어난 학생자원운동이 제 마음을 조선으로 이끌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 조선으로 가기로 한 것은 제가 아니라 다른 친구였다고 합니다. 그 자리를 대신 맡게 된 것이지요. 지금 돌아보면 그 우연 같은 자리바꿈조차 저를 이곳으로 보내려는 뜻이었다고 믿습니다.
Q. 부활주일에 도착하셨는데, 곧바로 서울로 들어가지 못하셨다고요.
그렇습니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양 사람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았습니다. 특히 서양 여인이 서울에 나타나는 것이 위험하다는 전갈이 와서, 저희 부부는 일주일 만에 일본으로 물러나야 했습니다. 그해 여름에야 다시 돌아와 정동에 짐을 풀 수 있었습니다.
Q. 배재학당은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거창하지 않았습니다. 동료 스크랜튼의 집 한 채를 사서 방 두 칸의 벽을 헐어 만든 작은 교실이 전부였습니다. 이겸라와 고영필, 두 사람에게 영어를 가르치던 것이 첫 수업이었지요. 그 둘은 서양 의술을 배우려고 영어가 필요했던 것이지, 배움 자체를 구하러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Q. 학생들이 출세를 위해 영어를 배우러 왔다면, 무엇을 가르치려 하셨습니까.
저는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라는 교훈을 걸었습니다. 우리는 통역관이나 학교의 일꾼을 길러 내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을 내보내려는 것이었습니다. 출세에 매인 시선을,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리로 돌려놓고 싶었습니다.
Q. 조선인을 서양 사람처럼 만들려 하셨던 것은 아닌지요.
그럴 뜻은 없었습니다. 저는 조선인이 조선인으로 세워져 스스로 조선 사회를 일으키기를 바랐습니다. 조선에는 조선만의 것이 필요하다고 믿었습니다. 남의 신학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으로 고백하는 신앙과 자주적인 정신을 지닌 사람이 자라나기를 바랐습니다.
Q. 여성에게 세례를 베푼 일을 특별하게 기억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벧엘예배당에서 집회를 시작한 다음 주일, 매서인 최성균의 아내 되는 최씨 부인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한국의 첫 개신교 여성 세례인이었지요. 저는 그 일을 ‘안방으로 통하는 길을 연 사건’이라 불렀습니다. 좀처럼 바깥과 마주하지 못하던 안방의 문이 한 사람의 세례로 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Q. 장로교의 언더우드 선교사와는 어떤 사이였습니까.
같은 부활주일에 함께 조선에 닿은 동행입니다. 교파는 달랐지만 초기의 좁은 땅에서 함께 일했습니다. 저는 감리교의 예배당을, 그는 장로교의 예배당을 세웠지요. 서로 구역을 나눈 것은 훨씬 뒤의 일이고, 처음에는 손을 잡고 함께 걸었습니다.
Q. 성경 번역과 출판에 힘을 쏟으셨는데, 왜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셨습니까.
사람들이 자기 말로 성경을 읽을 수 있어야 신앙이 제 것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번역은 단순히 말을 옮기는 일이 아니라, 조선의 정서에 맞는 성경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다투기도 하며 함께 연구했지요. 배재에 인쇄소를 둔 것도, 배운 이들이 스스로 세상에 글을 내보내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Q. 마지막으로, 조선을 향한 마음을 한마디로 전해 주신다면요.
저는 이 땅에 씨를 뿌리러 왔습니다. 당장 큰 나라를 세우는 일은 제 몫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일, 조선인이 조선인으로 일어서도록 돕는 일이 제게 맡겨진 씨앗이었습니다. 그 씨앗이 언젠가 이 땅 깊이 뿌리내리기를, 저는 뱃길 위에서도 바랐습니다.

자료 · 출처

  • 학생 심화 연구 (드리미학교 정선호)
  • 정선호, ‘한국교회 처음 이야기’·‘처음 읽는 이야기 한국 교회사’·‘정동이야기’ 연구 노트
  • 박제희, 에세이 ‘초기 개신교선교사들이 한국 근현대화에 끼친 영향’ (배재학당 관련 서술)
  • 학생 재구성 가상 인터뷰 (아펜젤러 자료 기반 창작)

사실 골격은 학생 심층 연구를 통설·사료와 대조해 정정했습니다(입국 1895년, 목포 첫 예배 1898년, 광주 개척 1904년 등). 삽화는 회화체 AI 일러스트로 실제 사진과 구분해 표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