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 면담(1958) · 국가기록원 CET0021614 · Wikimedia Commons(PD)“나는 ‘캐나다인’이라기보다 ‘조선인’이라고 생각됩니다.”
세브란스에서 가르친 수의병리학자이자, 3·1운동을 세계에 알린 ‘제34인’. 광복 후 다시 한국에 돌아와 신생 정부와 사회에 헌신했고, 외국인 최초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프랭크 스코필드는 영국에서 태어나 캐나다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그는 병으로 한쪽 몸이 불편해졌고, 평생 그 약함을 안고 살았다. 그는 수의학을 공부해 병리학자가 되었다.
1916년, 그는 세브란스의학교의 교수로 초빙되어 조선에 들어왔다. 처음 그의 일은 학생들을 가르치고 병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도착한 곳은, 머지않아 큰 격동을 맞을 나라였다.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났다. 만세를 부르던 사람들이 짓밟히고 끌려갔다. 외국인 교수였던 그는 모른 척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거리로 나가 그 참상을 사진과 글로 기록했다. 그는 그 일을 세계에 알린 사람, '제34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가 한 일은 위험했다. 그는 결국 한국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그는 멀리서도 한국을 잊지 않았고, 한국의 일을 계속 마음에 두었다.
광복이 오고 세월이 흐른 뒤, 노년의 그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1958년, 그는 이 땅에 영구히 머물기로 했다. 신생 대한민국의 가난한 학생들을 돕고, 잘못된 일에는 거리낌 없이 쓴소리를 했다. 그는 끝까지 한국의 양심이고자 했다.
1970년 그가 세상을 떠나자, 한국은 그를 국립묘지에 모셨다.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이었다. 약한 몸을 지녔던 한 사람이, 가장 약한 이들의 편에 끝까지 서 있었다. 그래서 한국은 그를 자기 사람으로 받아들였다.
- 1916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세균학·위생학 교수로 입국
- 1919년 3·1운동의 실상(제암리 학살 등)을 사진·기록으로 해외에 증언 — ‘34번째 민족대표’
- 일제의 압박으로 추방된 뒤에도 한국 독립과 인권을 변호
- 광복 후 1958년 영구 귀환, 신생 대한민국의 부패·불의를 비판하며 청년 교육에 헌신
그의 증언은 3·1운동을 국제사회에 알린 결정적 통로가 되었고, 광복 후에도 한국 사회의 양심으로 남았다. 외국인 최초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어,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벽안의 독립유공자가 되었다.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조선을 집으로 삼았습니다. 국립서울현충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연표
- 1916
세브란스 교수로 입국
- 1919
3·1운동을 해외에 증언
- 1958
광복 후 한국에 영구 귀환
- 1970
외국인 최초 국립묘지 안장
관계
관련 영상
원본 사진 모음 · 1점
공개 자료에서 본인으로 확인된 사진입니다. 기본은 원본(흑백)이며, ‘컬러’를 누르면 같은 톤의 AI 복원본으로 봅니다.

Frank Schofield meets South Korean president Syngman Rhee,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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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이승만 대통령 면담(1958) · 국가기록원 CET0021614 · Wikimedia Commons(PD) (CC/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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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aries from Aunae (Dreamy School). 「스코필드 (Frank W. Schofield, 1889–1970)」. https://missionaries-khaki.vercel.app/people/schofield (열람: 2026. 7. 4.)
스코필드의 삶에서,
당신은 무엇이 아름답다고 느꼈나요?
정답은 없습니다.
다만 이 질문을 가지고 가세요 —
나라면 무엇에 내 삶의 값을 치르고 싶은가.
복음이라는 바통은, 이제 당신의 손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