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media Commons1891년 남편 윌리엄 베어드와 함께 입국해 부산·대구를 거쳐 평양에 정착한 북장로회 여선교사. 평양에서 첫 여성 사경회를 열어 여성 신앙교육의 길을 닦았고, 한국어를 깊이 익혀 찬송가를 옮기고 『해 뜨는 동방(Daybreak in Korea)』 등 여러 책을 써 선교 현장을 세계에 알렸다.
애니 로리 애덤스는 미국 인디애나에서 태어나 대학을 마친 여성이었다. 1891년, 그는 윌리엄 베어드와 결혼해 함께 조선으로 향했다. 남편의 이름은 훗날 숭실을 세운 ‘배위량’으로 널리 기억되지만, 그 곁에는 자기 몫의 삶을 살아낸 한 사람이 늘 함께 있었다.
부부는 부산과 대구를 거쳐, 1897년 평양에 정착했다. 남편이 학교를 세우고 가르치는 동안, 그는 한국 여성들을 자신의 집으로 맞아들였다. 글을 모르던 여인들이 그 집에서 처음 글자를 익히고 성경을 읽었다. 평양에서 열린 첫 여성 사경회—여인들의 성경 공부반—도 그의 손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한국어를 깊이 익혔다. 단지 생활의 말이 아니라, 마음을 담아 옮길 수 있을 만큼이었다. 그래서 그는 찬송가를 한국어로 옮겼다. 서양의 가락에 한국의 말을 얹어, 한국 사람들이 자기 입으로 부를 수 있는 찬송을 만든 것이다.
그는 글을 쓰는 사람이기도 했다. 『해 뜨는 동방(Daybreak in Korea)』이라는 이야기책으로 조선 여인의 삶과 복음이 만나는 자리를 그렸고, 한국어를 배우려는 후배 선교사들을 위해 『50가지 도움』이라는 작은 안내서를 썼다. 『선교 생활의 안쪽 풍경』에서는 화려한 무용담이 아니라, 선교지의 평범하고 고단한 하루하루를 정직하게 적었다.
그의 일은 대개 이름난 직책이 붙지 않는 일이었다. 한 가정의 안주인으로, 여성들의 교사로, 번역자로, 그는 평양의 삶을 묵묵히 살았다. 무대 앞보다 무대 뒤에 가까운 자리였지만, 그 자리가 없었다면 세워지지 못했을 것들이 많았다.
1916년, 그는 평양에서 생을 마쳤다. 남편의 이름 뒤에 가려지기 쉬운 자리에서도 끝까지 자기 일을 놓지 않은 사람. 그가 옮긴 찬송과 그가 남긴 글은, 이름이 크게 불리지 않아도 한 사람의 헌신이 얼마나 멀리 닿는지를 조용히 증언한다.
이름난 직책 없이도, 한 가정의 안주인이자 교사이자 번역자로 평양의 삶을 살아냈다. 1916년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 1891년 남편 윌리엄 베어드와 함께 입국 — 부산·대구를 거쳐 1897년 평양에 정착
- 한국 여성들을 집으로 맞아들여 가르치고, 평양에서 첫 여성 사경회(성경 공부반)를 인도함
- 한국어를 깊이 익혀 남편의 번역과 저술을 도왔고, 여러 찬송가를 한국어로 옮김
- 『해 뜨는 동방(Daybreak in Korea, 1909)』·『한국어 학습자를 위한 50가지 도움(1911)』·『선교 생활의 안쪽 풍경(1913)』을 써 선교 현장을 안팎에 알림
그가 연 평양의 여성 사경회는 이후 여성 신앙교육과 부흥의 밑거름이 되었고, 그의 글은 한국 선교의 현실을 세계 독자에게 전한 드문 창이었다. 숭실의 설립기를 함께 견딘 동역자이기도 했다.
연표
- 1891
남편 베어드와 함께 입국 (서울·부산·대구)
- 1897
평양 정착 — 숭실 설립기 동역
- 1909
『해 뜨는 동방(Daybreak in Korea)』 출간
- 1916
평양에서 별세
관계
이 페이지 인용하기
Missionaries from Aunae (Dreamy School). 「안애리(애니 베어드) (Annie L. A. Baird, 1864–1916)」. https://missionaries-khaki.vercel.app/people/anniebaird (열람: 2026. 7. 4.)
안애리(애니 베어드)의 삶에서,
당신은 무엇이 아름답다고 느꼈나요?
정답은 없습니다.
다만 이 질문을 가지고 가세요 —
나라면 무엇에 내 삶의 값을 치르고 싶은가.
복음이라는 바통은, 이제 당신의 손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