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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게일 · 가상 인터뷰

드리미학교 ‘Missionaries from Aunae’ · 임선우 심층 연구

심화 이야기
시나리오 임선우 · 드리미학교 8기영상제작 박지원 · 드리미학교 8기

학생이 제임스 게일의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창작 인터뷰입니다. 실제 발언 기록이 아닙니다.

Q1.먼저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게일 선교사입니다. 1863년 2월 19일, 캐나다 온타리오 주 알마라는 작은 농촌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두고 ‘문학 번역가’라 부르곤 하는데, 『한영자전』이며 『천로역정』 같은 책을 여러 권 펴낸 까닭인 듯합니다.
Q2.대학 시절부터 선교를 마음에 두셨다고요.
그렇습니다. 오래 품고 있던 열정이 또렷한 결심으로 바뀐 것은 1887년이었습니다. 학생선교자원운동의 선구자였던 프린스턴 신학교의 윌더와 포먼이 토론토를 찾아왔지요. 그분들의 말씀이 제 마음을 깊이 흔들었고, 저는 이 길이 제게 주어진 길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Q3.처음 조선으로 떠날 비용은 어떻게 마련하셨습니까.
솔직히 그때 저에게는 돈이 없었습니다. 참으로 막막했지요. 다행히 토론토 대학 YMCA의 후원, 그러니까 학생들의 십시일반 덕분에, 스물다섯 살에 대학을 졸업하고 곧 선교사로 임명되어 조선으로 파송될 수 있었습니다.
Q4.언더우드 선교사를 만나 서울에 계시다가, 굳이 황해도 해주로 떠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조선의 삶과 문화를 더 가까이서 배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때까지 외국인이 나라 곳곳을 여행한 적은 있어도, 서울 밖에 나가 사는 일을 시도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걱정도 되고 기대도 되었지요. 그런데 그 미지의 세계가 자꾸만 저를 이끌더군요.
Q5.파송 단체였던 YMCA의 후원이 끊겼을 때는 어떻게 견디셨습니까.
지원이 끊긴다는 것은 사역이 멈춘다는 뜻이었습니다. 저는 궁핍에 시달렸고, 활동에도 큰 제약을 받았지요. 참 많이 울부짖던 시절입니다. 그러다 조선에서 사귄 벗, 의사 헤론과 마펫의 도움으로 1891년 미국 북장로회 소속으로 옮기게 되어 다시 길이 열렸습니다.
Q6.원산 시절은 힘들었다고 들었습니다만, 큰 업적도 그곳에서 이루셨지요.
맞습니다. 원산의 삶은 고단했지만, 바로 그곳에서 신·구약 성서 작업을 하고, 1895년에는 『천로역정』을 우리말로 펴냈습니다. 조선에 온 지 일곱 해 만이었지요. 그리고 두 해 뒤인 1897년에는 조선에서 처음 나온 『한영자전』을 간행했습니다. 물론 저 혼자가 아니라, 양기탁 같은 좋은 조력자들의 손이 함께한 일이었습니다.
Q7.여러 사역 가운데 하필 번역에 마음을 쏟으신 까닭이 있으신지요.
제게 주어진 달란트가 ‘언어’였던 것 같습니다. 낯선 말을 비교적 빨리 익히는 편이었지요. 무엇보다 저는 한글을 사랑했습니다. 세종대왕께서 만드셨다는 이 글자는 참으로 간명하고 배우기 쉽습니다. 그래서 저는 서명에 ‘기일(奇一)’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즐겨 씁니다.
Q8.『천로역정』을 첫 번역서로 고르신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천로역정』은 성경 다음으로 세계인이 애독하는 기독교 고전입니다. 저자의 생전에 이미 여러 판이 나올 만큼요. 이 책을 볼 때마다 번역하고 싶다는 마음이 자꾸 들었습니다. 조선인들도 틀림없이 좋아하리라 확신했거든요. 이 한 권으로 복음과 삶의 자세를 함께 전하고 싶었습니다.
Q9.연동교회에서 목회하시면서 다른 일도 병행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연동교회에서 27년을 섬겼습니다. 다만 강단에만 머물지는 않았습니다. 연동여학교와 예수교중학교를 세워 젊은이를 길렀고, 황성기독교청년회의 설립을 돕고, 청년들이 유학을 떠날 수 있도록 힘을 보탰지요. 제 몸을 조선을 위해 온전히 바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습니다.
Q10.조선의 문학을 서양에 처음 소개하신 일도 있으시지요.
네, 김만중의 『구운몽』을 영어로 옮겨 『The Cloud Dream of Nine』이라는 제목으로 펴냈습니다. 조선에도 이토록 깊고 오래된 이야기가 있음을 세계에 알리고 싶었습니다. 저는 조선을 그저 도와줄 대상이 아니라, 배울 것이 많은 문화로 만났습니다.